회색빛 세상에서 그리워지는 선명한 '직선'
우리는 모든 것이 상대화된 '포스트모던'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관용의 미덕 뒤에는, 무엇이 절대적인 진리인지 말하기 꺼려 하는 비겁함이 숨어 있기도 한다. 타협은 세련된 처세술이 되었고, 소신을 지키는 것은 고집불통의 구식으로 치부되곤 한다. 모든 것이 유연하게 휘어지는 회색빛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문득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서늘하고 선명한 '직선'의 의지를 그리워한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열여덟 번째 글자인 '차디(צ)'는 바로 그 선명한 수직의 의지를 상징한다. 차디는 히브리어로 '의인(Righteous person)'을 뜻하는 '짜디크(צַדִּיק, Tzadik)'의 첫 글자다. 이 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모두가 바람 부는 대로 눕는 들풀이 될 때, 당신은 거센 바람을 거슬러 홀로 꼿꼿이 서 있는 침엽수가 될 용기가 있는가?"
* '차디'(짜디)는 '차데' 혹은 '짜데'로도 읽습니다.

겸손한 무릎 위에 세워진 하늘의 안테나
'차디(צ)'의 고대 상형문자 유래는 '낚싯바늘(Fishhook)' 혹은 '사냥도구'다. 이는 매우 도전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의인이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헛된 욕망이 판치는 바다에서 '하늘의 가르침'이라는 바늘을 던져 진리와 생명을 낚아 올리는 사냥꾼과 같다는 것이다.
차디의 형상을 유심히 살펴보면 두 글자의 결합으로 보임을 알 수 있다. 아래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눈(נ, 겸손/넘어짐)'의 형상 위에,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인 '바브(ו, 연결)'가 올라타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의(Righteousness)'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정의를 내려준다. 참된 의로움이란 자신의 완벽함을 뽐내며 뻣뻣하게 서 있는 독선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혹은 절대적 진리) 앞에서 철저히 무릎 꿇는 겸손(נ)을 바탕으로 하되, 그 위에서 하늘의 뜻을 단단히 붙드는 연결(ו)이 이루어질 때 완성된다. 즉, 차디는 '무릎 꿇은 채 서 있는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세상의 중력을 거스르는 '의인의 무게'
'차디'가 담당하는 숫자 '90'은 성숙의 끝자락이자 완성(100)을 향한 마지막 관문이다. 이는 한 사회나 개인이 성숙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험이 '정의(Justice)'임을 시사한다.
윤리학적 관점에서의 차디는 '상황 윤리'에 매몰되지 않는 '원칙 중심의 삶'을 강조한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부여된 도덕적 명령을 묵묵히 수행하는 태도다.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유대 신비주의(카발라) 전통 설화에는 세상을 지탱하는 '36명의 숨겨진 의인(ל״ו צדיקים, Lamed Vav Tzadikim)'에 대한 설화가 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이 36명의 짜디크가 어디선가 올곧게 서 있기 때문에 신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고 유지한다는 믿음이다. 이는 거창한 혁명보다 '나 한 사람의 정직'이 세계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임을 역설한다.

타협은 안락함을 주지만, 올곧음은 생명을 준다
타협은 매력적이다. 적당히 눈감으면 갈등이 사라지고, 적당히 섞이면 이익이 찾아온다. 하지만 타협이 반복될 때 우리의 영혼은 힘을 잃고 흐물거리는 연체동물처럼 변해간다. 중심(Axis)이 사라진 존재는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힘없이 무너진다.
반면, '짜디'의 삶은 고단하다. 흐름을 거슬러야 하고, 때로는 외톨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올곧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고귀한 미학이다.
건축물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모든 재료가 중력에 순응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직으로 버티는 기둥이 중력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가정이, 당신의 직장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그곳에 타협하지 않는 '짜디'의 존재인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택하고, 외롭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그 누군가의 '수직적 저항'이 공동체의 붕괴를 막는 유일한 방어선이다.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지탱하는 기둥인가?
히브리어 열여덟 번째 글자 '짜디'(צ)는 "너는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낙엽인가, 아니면 그 흐름을 막아 서서 길을 만드는 바위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감을 안겨준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의인'이시다. 그분은 십자가라는 가장 처참한 '무릎 꿇음'의 자리에서, 인류를 향한 신의 사랑을 가장 '곧게' 증명해내셨다. 우리가 짜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세상의 어둠 속으로 빛의 바늘을 던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의인이 된다는 것은 거창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소리에 정직해지는 것, 작은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는 것, 그리고 내가 믿는 가치를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지금 척추를 바로 세워보라. 비겁한 타협의 유혹이 올 때, 마음속으로 '짜디'를 그려보라. 무릎은 낮게 꿇어 겸손하되, 머리는 하늘을 향해 꼿꼿이 쳐들고 진리를 낚아채는 그 당당한 형상을 닮으라. 당신 한 사람이 바로 서 있을 때, 비로소 당신 주변의 세계가 질서를 찾고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오늘, 세상을 지탱하는 36명 중 한 명의 '짜디크'(צַדִּיק)로 부름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