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의점 앞 인도가 화려한 바구니들로 점령당했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왔다는 신호다.
곰 인형이 껴안고 있는 초콜릿 바구니 가격을 보니 5만 원, 10만 원이 우습다. 며칠 전 졸업식 꽃다발 값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또다시 지갑을 위협하는 상술의 공습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지만, 내 눈에는 그저포장지만 화려한 자본주의의 계급장 놀이로 보일 뿐이다.
경찰 제복을 입고 순찰을 돌던 시절, 발렌타인데이 밤이면 유독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청년들을 많이 마주쳤다. 그들의 어깨에는 '나는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기념일에 선물을 받지 못하면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매력이 없는 '루저'로 낙인찍는 잔인한 문화를 만들었다. 상인들이 매출을 올리기 위해 만든 날에, 왜 죄 없는 청춘들이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자괴감에 빠져야 하는가.
더 고약한 것은 학교와 직장의 풍경이다. 교실에서는 책상 위에 쌓인 초콜릿 개수가 곧 권력이자 서열이 된다. 하나도 받지 못한 아이가 느끼는 소외감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날카롭다.
이것은 일종의 정서적 폭력이다. 내가 만난 학교 밖 청소년 중에는 이런 기념일마다 소외감을 견디다 못해 아예 학교를 결석하거나, 돈을 훔쳐서라도 선물을 사서 돌리며 관심을 구걸했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직장이라고 다를까. 이맘때면 '의리 초콜릿'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상사나 동료들에게 돌릴 초콜릿을 강매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여직원들끼리 돈을 걷어 팀장님 선물을 산다거나, 막내 사원이 눈치를 보며 전 직원 간식을 포장하는 풍경은 여전하다.
마음에도 없는 선물을 억지로 준비해야 하는 그 스트레스, 그게 바로 '감정 노동'이고 인권 침해다. 직장 상사들이여, 부하 직원에게 받는 초콜릿이 정말 달콤한가. 그건 선물이 아니라 당신의 지위를 이용한 세금 징수일 뿐이다.
사랑은 돈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수십만 원짜리 명품 초콜릿을 주고받아야만 사랑이 확인된다면, 그 사랑은 유통기한이 초콜릿보다 짧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물질'이 아닌 '마음'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화려한 포장지 속에 든 공허함보다는, 투박하더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제발 이번 발렌타인데이에는 "너 몇 개 받았어?"라고 묻지 말자. 그 무심한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비수가 되어 꽂힌다. 상술에 놀아나 텅 빈 지갑을 보며 한숨 쉬는 대신, 차라리 그 돈으로 나 자신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선물하자.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따위로 매겨질 수 없는, 당신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귀한 사람이니까.초콜릿보다 더 달콤한 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된 자유다.
칼럼니스트 소개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이자 35년간의 경찰 생활을 총경으로 마무리한 치안 행정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 주요 기관에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감수성, 4대폭력 예방, 자살 예방 및 직장 내 장애인 인식 개선, 인권 예방, 리더십 코칭 등 폭넓은 주제로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 '그대는 늘 선물입니다' 등이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인권이 성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