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2문
Q. 22. How did Christ, being the Son of God, become man? A. Christ, the Son of God, became man, by taking to himself a true body and a reasonable soul, being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and born of her, yet without sin.
문 22.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참 몸과 이성적인 영혼을 취하심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어 그에게서 태어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 2:14)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 26:38)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초월'을 갈구해 왔다. 고대 신화 속 영웅들은 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분투했고, 현대의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을 통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정점인 성육신(Incarnatio)은 정반대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무한이 유한 속으로, 영원이 시간 속으로, 그리고 창조주가 피조물의 비좁은 피부 안으로 스스로를 구겨 넣은 사건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2문은 이 거대한 우주적 하강을 '참 몸'과 '이성적인 영혼'이라는 치밀한 인문학적 언어로 정의한다.
철학적으로 볼 때,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주장은 형용모순에 가깝다. 플라톤(Platon)적 사고에서 이데아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와 결코 섞일 수 없으며, 가변적이고 부패하기 쉬운 육체는 영혼의 감옥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참 몸(True body)'을 취하셨다고 선언한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외형을 빌린 '환영'이 아니라, 배고픔을 느끼고 고통에 신음하며 죽음의 공포 앞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실존적 육체를 의미한다. 인문학적으로 이는 '물질성'에 대한 최고의 긍정이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비루한 일상과 땀 냄새 나는 육체적 삶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저급한 것이 아님을 웅변한다.
또한 소요리문답은 그리스도가 '이성적인 영혼'을 가지셨음을 강조한다. 이는 당시 기독교계를 흔들었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 즉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인간의 정신 대신 신의 ‘로고스(Logos)’가 자리 잡았다는 가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만약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지정의(知情意)가 없었다면, 그는 인간의 고뇌를 이해할 수 없는 인공지능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구조의 심리를 가졌기에 인간의 슬픔에 공감하고, 배신에 아파하며, 지적인 고뇌를 경험하셨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치유는 '공감'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하드웨어(몸)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영혼)까지 완벽히 탑재하셨다는 것은, 그가 인류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들어오셨음을 의미한다.

경제학과 비즈니스 세계에서 리더십의 핵심은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이다. '나심 탈레브(Nassim Taleb)'가 주장했듯이 자신이 내린 결정의 결과로 발생하는 위험을 직접 부담하지 않는 리더는 신뢰할 수 없다. 성육신은 신이 인류 구원이라는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스킨'을 직접 투입한 사건이다. 그는 보좌에 앉아 지시만 내리는 경영자가 아니라, 가장 열악한 현장인 '인간의 삶'이라는 공장 바닥으로 내려와 노동의 고단함과 법적인 억울함을 몸소 겪어내셨다. 이러한 '현장 밀착형 리더십'이야말로 현대 비즈니스 윤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성육신의 방식 또한 독특하다.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셨다. 이는 생물학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초자연적 개입이다. 라틴어 '케노시스(Kenosis)'는 자기 비움을 뜻한다. '신성(Divinitas)'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신성의 영광스러운 권리 사용을 스스로 제한하고 인간의 태중에 갇히는 '비하(Humiliatio)'를 선택하신 것이다. 이는 권력을 가진 자가 낮은 곳으로 임할 때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문학적 교훈을 남긴다.
아울러 소요리문답은 그가 '죄는 없으시다'는 점을 명시한다. 여기서 '죄 없음'은 단순히 도덕적인 결함이 없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은 타락으로 인해 왜곡된 인류의 유전적 굴레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류(New Humanity)'의 등장을 의미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세계 내(內) 존재'로서 한계 지어진 존재로 보았지만, 죄 없는 그리스도는 인간이 본래 도달했어야 할 '완전한 인상(Imago Dei)'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된다. 그는 결함 있는 시스템 속에 들어온 '완벽한 패치'와 같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학적 도그마(dogma)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소외된 자들에게는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은 이가 있다는 '위로'를, 리더들에게는 책임을 공유하는 '헌신의 모델'을,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는 육체와 영혼을 지닌 존재로서의 고귀한 '존엄성'을 일깨워준다. 신이 인간이 되기로 결정한 그 순간, 인간의 언어는 비로소 하늘의 소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오늘날 '진정성(Authenticity)'이 고갈된 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화면 너머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지만, 그리스도는 직접 그 고통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진정한 혁신과 변화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될 때 일어난다. 당신이 속한 공동체나 비즈니스 현장에서 '참된 몸'으로 부딪히고 '이성적인 영혼'으로 소통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라. 가장 높은 곳에 머무는 것이 권력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공감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 진정한 위대함이다.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