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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칼럼] 117화 기록 앞에 앉는다는 것

보통의가치 칼럼, '일상에서 배우다'

기록은 남기기 위함이 아닌, 내려놓기 위한 것

기록은 보관하는 일이 아니라, 다시 살아오게 하는 일

▲ 기사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사진=Unsplash]

 

책상 한쪽에 놓인 오래된 인쇄본

책상 한쪽에 오래된 인쇄본 한 권이 놓여 있다. 표지는 바랬고, 모서리에는 여러 번 넘겨진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책을 꺼낼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늘 같은 페이지쯤에서 손이 멈춘다. 몇 해 전의 하루, 특별할 것 없던 날이지만 그 페이지를 펼치면 그날의 공기와 감정이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기록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다시 데려온다.

 

기억보다 먼저 다가오는 감정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려 하면 쉽게 흐릿해진다.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조차 선명하지 않다. 분명 하루는 흘러갔지만, 그 시간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된 기록 속의 하루는 다르다.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멈춘 문장 하나에서 그날의 감정이 먼저 살아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그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가 앞서 다가온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그 시간 속에 다시 앉아 있는 기분이 된다.

 

하루의 끝에 놓였던 기록의 자리

스무 살 무렵부터 일기를 써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날 있었던 일과 순간의 감정을 몇 줄 적어두는 일이었다. 문장을 다듬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었다. 다만 기록을 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루가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 들었고, 복잡하던 생각이 잠시 멈췄다. 기록은 늘 하루의 끝에서 조용히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록하지 않은 날이 남긴 감각

기록을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하루가 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괜히 어수선했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다. 그 경험들이 쌓이면서 기록은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어느새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기록은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하루를 내려놓기 위한 방식에 더 가까웠다.

 

흩어진 시간을 묶고 싶었던 순간

그렇게 쌓인 기록은 어느새 수십 권이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이 기록들을 한 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흩어져 있던 시간들이 한곳에 모여 있기를 바랐던 마음에 가까웠다. 그렇게 이십 대의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의 인쇄본으로 묶게 되었다.

 

책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준 안도감

완성된 자서전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취감보다는 이상한 안도감에 가까웠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한 권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마음을 건드렸다. 그 책은 잘 쓰인 글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도 아니었다. 다만 그 안에는 분명히 내가 있었다.

 

기록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서른을 지나며 삶의 속도는 달라졌고 책임은 많아졌다. 그러나 기록 앞에 앉는 시간만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흔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기록을 정리해볼 생각을 하고 있다. 이번에는 삼십 대의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기록을 남긴다는 일은 끝나지 않는 질문처럼 늘 앞에 놓여 있었다.

 

기록이 시간을 다시 살게 하는 방식

어느 날 예전에 만든 자서전 인쇄본을 다시 펼쳤다. 목적 없이 넘기다 멈춘 한 페이지에서, 그날의 감정이 먼저 다가왔다. 사건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느꼈던 불안과 기대, 사소한 안도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기록은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일이 아니라, 다시 살아오게 하는 일에 가깝다는 것을.

 

자서전에 대한 오래된 질문

왜 기록은 늘 특별한 사람의 몫이어야 하는가.

그 인식은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졌다. 왜 자서전은 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여야 하는가. 왜 기록은 특별한 사람만의 몫처럼 여겨지는가. 한 사람의 삶이 책이 되기 위해 반드시 대단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기록이 이렇게 나를 다시 불러올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의 기록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은 오래 머물렀다.

 

함께 앉아보는 기록의 자리

그 질문 끝에서 자서전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되었다.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록 앞에 앉아본 사람으로서 그 자리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잘 쓰는 자서전이 아니라, 쓰지 못한 첫 문장을 앞에 두고 함께 앉아보는 시간. 성공한 사람만의 기록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삶을 한 번쯤 불러올 수 있는 기록 말이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우리는 언제 마지막으로 자기 삶 앞에 멈춰 앉았는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며 기록 앞에 앉은 때는 언제였는가. 특별한 사건이 없으면 기록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삶을 남기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시 살아보기 위해 기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지 묻게 된다.

 

완성이 아닌 살아 있음으로서의 기록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하루를 적는다.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은 남아 있고, 그 문장을 완성할 생각도 없다. 다만 기록을 통해 나와 다른 누군가가 자기 삶의 한 페이지 앞에 잠시 멈출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록은 나를 완성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지나온 시간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록은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 해당 글은 우리문학 공모전에 응모한 작품을 보통의가치 뉴스 칼럼식으로 바꿔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 ‘보통의가치’ 뉴스는 작은 일상을 기록하여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치를 전하고 있습니다.

작성 2026.02.12 23:42 수정 2026.02.1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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