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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다리를 놓다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읽는 현대 사회(25)

공의의 날카로운 칼날과 사랑의 따스한 품이 만나는 지점

자기 비움을 통해 인류의 근원적 부채를 청산하다

책임의 전가에서 책임의 수용으로 나아가는 리더십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5문

 

Q. 25. How doth Christ execute the office of a priest? A. Christ executeth the office of a priest, in his once offering up of himself a sacrifice to satisfy divine justice, and reconcile us to God; and in making continual intercession for us.
문 25.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십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희생하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AI 이미지 (제공: 미디어 울림)

 

인간의 역사는 '부채(Debt)'와 '죄책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률학적으로는 범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경제학적으로는 빌린 돈을 갚아야 하며, 심리학적으로는 타인에게 준 상처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 이 모든 관계의 밑바닥에는 '정의(Justice)'라는 엄격한 저울이 놓여 있다. 저울의 수평이 깨지는 순간 평화는 깨지고 갈등이 시작된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거룩한 신의 공의라는 저울 앞에서 죄를 입은 인간은 결코 수평을 맞출 수 없는 파산 상태에 직면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5문은 이 절망적인 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신 그리스도의 '제사장(ἱερεύς, 히에류스)' 사역을 다룬다.

 

제사장을 뜻하는 라틴어 '폰티펙스(Pontifex)'는 본래 '다리를 놓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끊어진 두 세계를 잇는 이 가교의 직분은 구약 시대부터 엄격하게 수행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 제사장들은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들 자신도 죄인이었기에 먼저 자신을 위한 제사를 드려야 했고, 그들이 드리는 짐승의 피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이 반복되는 굴레를 끊어내셨다.

 

본 문답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라는 표현에서 '만족시키다(Satisfy)'라는 표현은 라틴어 '사티스팍티오(Satisfac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법적 혹은 도덕적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여 상대방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엄중한 공의가 요구하는 죄의 대가를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으로 '완불(Paid in full)'하신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는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집단이 선택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인간 사회는 폭력을 잠재우기 위해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함으로써 가짜 평화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은 이 메커니즘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죄 없는 분이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폭력의 연쇄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고 멈춰 세운 것이다. 

 

이는 인간 내면의 깊은 죄책감을 해소하는 유일한 길이다. 상담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고통 중 상당 부분은 '용서받지 못했다'는 감각에서 기인한다. 그리스도는 공의를 무시하고 대충 넘어가는 리더가 아니라, 공의의 요구를 자신이 대신 짊어짐으로써 인간에게 진정한 정서적 해방과 화목(Reconciliation)을 선사한다.

 

 

비즈니스 윤리와 리더십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은 최고의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을 보여준다. 나심 탈레브(Nassim Taleb)는 "진정한 리더십이란 자신의 결정에 따른 위험을 직접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에서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역사의 현장으로 내려와 자신의 '스킨(육체)'을 희생 제물로 내던지셨다. 이러한 리더십은 신뢰의 근간이 된다. 리더가 구성원의 실수를 대신 책임지고, 그 대가를 본인이 치를 때 조직원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리더와 화목하게 된다. 제사장적 리더십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수용하는 데서 그 권위가 발생한다.

 

또한 소요리문답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과거의 희생제사로 끝나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간구(Intercession)'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법정에서 우리를 변호하는 '상주 변호인'과 같다. 참고 성경구절인 히브리서 7:25절에서 '간구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엔튕카노(ἐντυγχάνω)'는 타인을 위해 왕에게 탄원하거나 중재하는 행위를 뜻한다. ‘엔튕카노’는 단순히 말을 대신 전하는 수준을 넘어, 상대방의 처지를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공감적 기도를 의미한다. 현대 사회의 비정한 경쟁 속에서 누군가 나를 위해 조건 없이 변호하고 지지해주고 있다는 감각은 한 인간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강력한 심리적 자산이 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평행선이 십자가라는 교차점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세상을 향한 '작은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갈등의 현장에서 화해의 다리를 놓으며,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빌어주는 삶이 바로 제사장적 삶이다. 그리스도가 흘린 피는 단순한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인류가 직면한 근원적 고립과 죄책감의 감옥을 부수고 나가는 자유의 선포다.

 

우리는 흔히 '정의'를 외치며 타인을 정죄하거나, '사랑'을 말하며 불의를 방치하는 양극단에 서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은 정의를 세우면서도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대신 죽는 희생'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 현장에 필요한 것은 더 날카로운 논리가 아니라, 내가 먼저 손해를 봄으로써 깨진 관계를 잇는 제사장적 결단이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 그를 위해 먼저 다리가 되어주는 삶, 그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제사장의 길을 따르는 현대인의 가장 고귀한 윤리일 것이다.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외

 

 

 

작성 2026.02.14 12:34 수정 2026.02.14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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