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말 류큐 왕국(琉球王國)과 한반도(고려·조선) 사이의 교역은 바다를 통한 외교적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1389년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고려인을 송환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면서 공식 교류가 열렸다.
이후 류큐 선박은 아마미(奄美)·규슈(九州)·쓰시마(対馬)·부산(釜山)으로 이어지는 연안 항로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위협과 일본 상인의 사절 위조 사건으로 교역은 쇠퇴하였다. 이후 이 항로는 표류민 송환로로 기능을 이어갔다.

1389년 류큐의 중산왕 찰도는 왜구에게 납치된 고려인을 송환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국 간 공식 해상 교류가 시작되었다.
류큐 선박은 동중국해 외해를 직접 횡단하지 않았다. 대신 섬과 연안을 따라 북상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출항 후 아마미 군도(奄美諸島)를 거쳐 규슈 서해안을 따라 이동하였다. 이어 쓰시마(対馬)를 경유해 조선의 부산에 도달하였다.
이 항로는 외해 항해보다 안전한 기착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풍랑을 피하고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점이 고려된 결과였다.
이 항로는 지리적 어려움뿐 아니라 왜구라는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규슈 서해안과 쓰시마, 조선 연안은 왜구 활동이 빈번한 해역이었다.
이로 인해 교역 구조는 비대칭적이었다. 조선은 위험 부담 때문에 류큐로 직접 선박을 보내지 않았다. 양국 교역은 류큐 선박이 부산까지 항해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졌다. 조선 선박은 류큐로 향하지 않았지만, 류큐 선박의 지속적 항해로 외교적 신뢰가 유지되었다.
15세기 중반 이후 류큐 선박의 조선 왕래는 감소하였다. 가장 큰 원인은 일본 상인의 위조 사절 사건이었다. 대마도와 규슈 상인들은 류큐 국왕의 공식 사절인 것처럼 신분을 속이고 조선에 나타났다. 이들은 류큐 교역 이익을 가로채려 하였다.
조선 조정은 진위 여부를 식별하기 어려워졌다. 중간 해역에서의 방해와 신분 위조가 겹치면서 공식 교역은 점차 쇠퇴하였다.
교역 기능은 약화되었지만, 해류로 인해 이 바닷길은 다른 역할을 하였다. 표류민 송환로로 기능한 것이다. 1477년 김비의를 포함한 조선인 표류민이 요나구니지마(与那国島)에서 구조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1562년에는 조선인 8명이 미야코지마(宮古島)에 표류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이처럼 교역은 중단되었지만, 인도적 교류의 흔적은 지속되었다.
아마미·규슈·쓰시마·부산을 잇는 항로는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중반까지 류큐와 조선을 연결한 주요 해상 루트였다. 왜구의 위협과 일본 상인의 위조 사건으로 공식 교역은 쇠퇴하였다. 그러나 이 항로는 이후 표류민 송환이라는 인도적 교류의 통로로 역사에 남았다.
이는 해상 교류가 단순한 무역을 넘어 외교와 생명 보호의 기능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