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 사쓰마 번(薩摩藩)의 침공 이후 류큐 왕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중국과의 책봉 관계를 유지하는 양속 체제에 놓였다.
이 특수한 정치 구조 속에서 일본인은 실질적인 지배자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존재를 숨겨야 하는 ‘이국인’으로 취급되었다. 류큐 왕국과 사쓰마 번은 중국과의 조공 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인의 존재를 위장하거나 철저히 은폐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1609년 사쓰마 번의 군사 침공 이후 류큐 왕국은 정치적으로 일본의 통제 아래 놓였다. 그러나 외교적으로는 중국과의 책봉 관계를 유지하는 독특한 양속 체제를 유지했다.
이 구조 속에서 류큐 사회에는 매우 특이한 상황이 나타났다. 일본인은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국인’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중국과의 조공 무역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사쓰마 번은 류큐를 지배하면서도 일본 문화가 류큐 사회에 드러나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다. 중국이 류큐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조공 무역이 중단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쓰마 번은 류큐인에게 일본식 풍속을 금지하는 법령을 시행했다.
1617년에는 일본식 상투와 의복 착용이 금지되었고, 1624년에는 일본식 이름 사용과 일본식 복장 자체가 전면 금지되었다. 이 정책은 류큐 사회에서 일본과의 문화적 연결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류큐 왕국은 중국에 일본인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보물섬(宝島)’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보물섬은 본래 도카라 열도를 가리키는 지명이었지만, 류큐 왕부는 이를 이용해 일본인을 다른 외국인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류큐는 중국에 대해 “현재는 일본의 속도인 토카라 상인들만이 물자를 공급한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류큐에 체류하는 일본 상인과 표류민은 공식적으로 ‘보물섬 사람’이라는 가상의 외국인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일본 선박 역시 중국 사람 앞에서는 보물섬 선박으로 위장해야 했다.
이러한 은폐 정책은 중국의 책봉사 방문 때 가장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당시 나하에는 사쓰마 번 관리들이 상주하는 재번봉행 관청이 존재했다. 그러나 중국 사신단이 류큐에 도착하면 일본 관리들은 모두 우라소에의 시로마 마을로 이동해 숨어 지냈다.
류큐 왕부는 중국 사신들이 해당 지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사신들이 이곳의 존재를 묻는 경우에는 아마미 군도에서 온 관리들의 숙소라고 설명했다.
중국 사신이 류큐에 머무는 동안 왕부는 특별 통제 조직을 운영했다. 이 조직은 ‘간센소요코메카타(冠船惣横目方)’로 불렸으며, 민중에게 47개 조항의 규제를 적용했다. 규제의 핵심은 일본 문화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기간에는 일본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일본식 의복이나 서적의 노출도 금지되었다.일본과 관련된 모든 요소가 외교적 위험 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사쓰마 번의 지배 이후 류큐 왕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매우 복잡한 정치 구조를 유지해야 했다. 일본인은 실제 권력을 행사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존재를 숨겨야 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자’였다.
이러한 은폐 정책은 류큐 왕국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고도의 외교 전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