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의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알려진 고구마는 1605년 노구니 소칸(野国総管)이 오키나와 본도에 들여온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고구마는 그보다 앞선 1597년 미야코지마에서 처음 재배되었다.
이후 고구마는 류큐 열도 전역에 확산되어 기근을 완화하는 식량 혁명을 가져왔다. 하지만 사쓰마 지배 이후 도입된 인두세 체제 속에서 고구마는 사키시마 제도 민중에게 생존을 위한 유일한 식량이자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류큐 왕국을 대표하는 구황작물로 알려진 고구마, 즉 사츠마이모의 도입 시점은 일반적으로 1605년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노구니 소칸이 중국 푸젠성에서 오키나와 본도로 고구마를 들여온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을 보면 류큐 열도에서 고구마가 처음 재배된 지역은 오키나와 본도가 아니라 미야코지마였다.
카와미츠씨 가보(河充氏家譜)에 따르면 1597년 미야코의 유력자 스나카와 페친 시야가 고구마를 처음 도입하여 재배를 시작했다. 이는 오키나와 본도보다 8년 빠른 시점이며, 야에야마 제도에 고구마가 도입된 1694년보다도 약 한 세기 앞선 사건이다.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남미 지역이다. 이후 유럽인들의 항해를 통해 아시아로 전해졌고 중국을 거쳐 류큐 열도로 들어왔다.
류큐 열도는 태풍과 가뭄이 잦은 지역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재배가 쉬운 고구마는 매우 중요한 식량이 되었다.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고 수확 주기가 빠른 고구마는 류큐 사회의 식량 사정을 크게 개선한 작물이었다.
그러나 고구마는 사키시마 제도 주민들에게 단순한 구황작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1609년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류큐 왕부는 막대한 공납 부담을 떠안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 제도를 시행했다.
1637년경부터 미야코와 야에야마 지역에는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이 세금은 토지나 생산량이 아니라 사람의 수를 기준으로 부과되었다. 1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녀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조였다.
인두세 체제에서는 쌀과 같은 주요 곡물이 모두 왕부와 지방 관리에게 수탈되었다. 미야코와 야에야마 주민들에게 남겨진 식량은 거의 없었다.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고구마와 고구마 잎, 그리고 해초류 정도였다. 이러한 식생활 구조는 메이지 시대 초 인두세가 폐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고구마는 사키시마 민중에게 사실상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식량이었다.
고구마는 생산량 증가와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인두세 체제에서는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세금 기준이 머릿수였기 때문에 가족 수가 늘어날수록 세금 부담도 증가했다. 이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를 죽이는 영아 살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고구마는 비교적 재해에 강한 작물이었지만 연이은 흉작과 태풍 앞에서는 식량 부족을 막지 못했다. 18세기 이후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자 일부 지역에서는 소철을 식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철은 독성이 있는 식물로 조리 과정이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굶주림 속에서 이를 먹다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이 시기의 참상을 후대에서는 ‘소철 지옥’이라고 불렀다.
미야코지마에서 시작된 고구마 재배는 이후 오키나와 본도와 류큐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705년에는 이 작물이 사쓰마 번으로 전해졌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를 ‘류큐이모’라고 불렀다. 이후 학자 아오키 콘요의 연구와 보급 활동을 통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사쓰마에서 온 감자라는 의미의 ‘사츠마이모’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미야코지마에서 시작된 고구마 재배는 류큐 농업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고구마는 기근 속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한 작물이었지만 동시에 인두세 체제 아래 민중의 고통을 상징하는 식량이기도 했다.
이 작물을 둘러싼 역사는 류큐 왕국의 화려한 해상 무역 뒤에 숨겨진 낙도 주민들의 삶과 생존 투쟁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