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건망증보다 무서운 신호가 포착됐다. 파킨슨병 환자들 사이에서 '길 찾기'나 '사물 복사' 같은 시각공간 인지능력이 가장 먼저 감퇴하기 시작할 경우,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무려 7배 이상 치솟는다는 사실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규명됐다.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은 국가 연구 인프라인 ‘뇌질환 연구기반 조성사업(BRIDGE)’을 통해 초기 파킨슨병 환자의 인지 기능 저하 순서가 치매 전환의 '결정적 예보'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세브란스병원 신경과 이필휴·정석종·박찬욱 교수 연구팀이 주도했으며,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인 「Alzheimer’s & Dementia(IF 11.1)」 최신호에 게재되며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연구팀은 정밀한 분석을 위해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신규 진단된 약물 미투여 파킨슨병 환자 474명을 평균 5년 이상 장기 추적했다. 특히 이번 연구에는 'SuStaIn(Subtype and Stage Inference)'이라는 첨단 머신러닝 알고리즘이 도입됐다. 이를 통해 단순히 특정 시점의 점수를 비교하는 한계를 넘어, 인지 영역별 저하가 나타나는 시간적 궤적을 분석해 환자들을 네 가지 아형으로 분류했다.
분석 결과, '시공간 기능 우선 저하형(Subtype 2)'의 치매 전환 위험은 압도적이었다. 이들은 기억력 저하가 먼저 나타난 그룹(Subtype 1)보다 치매 위험이 7.3배 높았으며, 전두엽 집행기능이 먼저 떨어진 그룹(Subtype 3)과 비교해도 3.2배 높은 위험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이러한 위험 격차는 발병 후 약 3.5년이 지나는 시점부터 더욱 뚜렷하게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상 검사를 통한 뇌 생물학적 변화도 이를 뒷받침한다. 시공간 능력이 먼저 저하된 환자들은 뇌의 두정후두엽 피질 및 쐐기앞소엽 부위에서 혈류 관류가 유의하게 낮았으며, 연합·변연계 선조체 전반에서 도파민 운반체 가용성이 급격히 감소한 상태였다. 이는 뇌 후방 피질의 구조적·기능적 손상이 파킨슨병 환자를 치매로 몰아넣는 핵심 기전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결과는 이른바 '이중 증후군 가설(Dual Syndrome Hypothesis)'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파킨슨병의 인지 저하가 전두엽 기반의 느린 진행형과 후방 피질 기반의 빠른 치매형으로 나뉜다는 학계의 가설이 이번 대규모 데이터를 통해 입증된 셈이다.
정석종 세브란스병원 교수는 "인지 저하가 나타나는 '순서'를 기반으로 분석함으로써 초기 시공간 기능 장애 환자가 가장 위험하다는 점을 정량적으로 제시했다"며, "임상 현장에서 고위험군을 조기에 선별하고 환자 맞춤형 중재 전략을 설계하는 데 핵심 근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립보건연구원은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고품질 임상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예방 및 관리 지침 개발로 연계할 방침이다. 임승관 질병관리청장은 "인지 변화 양상을 기반으로 한 정밀한 치매 예측은 환자의 삶의 질 향상에 직결된다"며, "향후 정밀 의료 기반의 치매 관리 전략 수립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파킨슨병 진단 초기, 단순한 기억력 테스트를 넘어 시공간 지각 능력을 정밀하게 점검하는 것이 치매 예방의 핵심이다. 뇌의 후방 피질이 보내는 경고음을 조기에 감지하는 시스템이 구축됨에 따라, 파킨슨병 환자들의 '지워지지 않는 내일'을 위한 과학적 방어선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