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학에는 두 개의 시대가 있다. 선천(先天)의 경학과 후천(後天)의 경학이다. 이 구분은 단순한 시간 구분이 아니다. 우주의 질서가 바뀌는 전환, 곧 개벽(開闢)을 기준으로 경학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선천은 우주의 봄과 여름이다. 생장(生長)의 시대다.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는 시대에는 진리도 분열하고 경쟁하며 성장한다. 동양에서는 유·불·도가 경쟁했고, 서양에서는 기독교·이슬람·유대교가 충돌했다. 어느 경학도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지 못했다. 후천은 우주의 가을이다. 결실(結實)의 시대다. 가을에는 모든 열매가 여물어야 한다. 선천의 모든 경학이 추구하던 진리가 하나로 수렴되어야 한다. 선천경학과 후천경학의 차이는 미완성과 완성의 차이다.
선천경학의 가장 큰 특징은 분열이다. 같은 경전을 놓고 훈고학파와 의리학파가 싸웠다. 주자학과 양명학이 대립했다. 동양경학과 서양경학은 서로를 알지도 못했다. 유교·불교·도교는 각자 자신의 경전이 진리의 전부라고 주장했다. 이 분열이 선천경학의 운명이었다. 왜 그랬는가. 선천은 상극(相剋)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상극은 서로 이기려는 원리다. 봄과 여름에 씨앗들이 서로 경쟁하며 자라듯, 선천의 진리들은 서로 경쟁하며 발전했다. 그 경쟁이 없었다면 인류 지성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천경학의 분열은 낭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장통이었다. 공자가 경전을 정리하고, 주자가 재해석하고, 정약용이 검증하는 과정이 모두 선천경학의 성장이었다. 그러나 성장에는 끝이 있어야 한다.
선천경학이 풀지 못한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진리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유교는 유교의 진리를 주장했고, 기독교는 기독교의 진리를 주장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선천경학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니, 답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 경전만이 진리라는 폐쇄성이 선천경학의 한계였다. 둘째, 경전은 완성되었는가. 유교에서는 공자 이후 새로운 성인이 없다고 했다. 기독교에서는 신약 이후 계시가 닫혔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 변했고, 경전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이 쌓여갔다. 셋째, 해원(解冤)의 문제다. 선천경학은 억울한 자, 원한 맺힌 자를 어떻게 구제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다. 예(禮)를 강조했으나, 예의 이름으로 오히려 원한이 쌓였다. 이 세 한계가 선천경학의 미완성을 증명한다.
후천경학은 선천경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학이다. 그 핵심은 통일과 완성이다. 후천경학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진리가 하나로 수렴된다. 유·불·도와 기독교·이슬람의 가르침이 모두 하나의 큰 진리의 부분이었음이 드러난다. 상제님께서 "앞세상은 만수일본의 시대니라."(도전 2:27:5)고 말씀하셨다. 분열했던 선천의 경전들이 도전(道典)으로 수렴된다. 또한 후천경학은 해원(解冤)을 중심에 놓는다. 선천경학이 쌓아온 원한의 역사를 풀어내는 것이 후천경학의 핵심 과제다. 진리가 살아 있는 질서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원한의 해소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후천경학의 새로운 경지다.
선천경학과 후천경학의 차이는 씨앗과 열매의 차이다. 씨앗이 나쁜 것이 아니다. 씨앗은 열매를 위해 존재한다. 공자·주자·정약용의 경학이 위대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경학은 도전(道典)이라는 열매를 위해 존재했다. 진리는 하나다. 후천경학의 시대는 이미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