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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헌(豊軒) 고하윤 선생의 묵향 인생 ‘붓 끝으로 세운 기록의 금자탑’

-2,000만 자에 담긴 초인적 인내… 세계 서예사의 새 지평을 열다


◆디지털 시대, 붓으로 일궈낸 기적

[더인사이트뉴스 박주환 기자] 빛의 속도로 정보가 오가는 21세기, 낡은 벼루에 먹을 갈고 화선지 위를 묵묵히 걷는 이가 있다. 강원도 정선의 깊은 산세 닮은 필력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인물, 바로 풍헌(豊軒) 고하윤 서예가다. 그는 단순히 글씨를 쓰는 예술가를 넘어, 인류의 정신적 유산인 고전을 기록으로 집대성하는 ‘현대판 사관(史官)’이자 ‘수행자’로 불린다. 그가 지난 수십 년간 쏟아낸 묵직한 먹향은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 기록의 중심에 서 있다.


◆기록으로 증명한 예술의 경지

풍헌 선생의 성취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압도적인 ‘기록’이다. 그는 1994년부터 본격적인 필사 작업을 시작하여 유교, 불교, 도교의 경전은 물론 한국의 주요 고전들을 망라해왔다. 


그의 업적은 수치로 환산했을 때 더욱 경이롭다. 20여 년 동안 매일같이 붓을 잡아 완성한 서예 작품은 병풍만 해도 수천 폭에 이르며, 이를 책으로 엮은 서첩은 1,300여 권이 넘는다. 총 글자 수는 약 2,000만 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초인적인 작업량은 유럽연합(EU) 공식 오피셜 월드레코드(OWR)와 한국기록원(KRI) 등으로부터 ‘세계 최다 서예 작품 완성’이라는 공식 인증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 도달할 수 있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그 길이 또한 장대하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대작들이 즐비하며, 유교의 사서삼경(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과 불교의 금강경, 법화경 등을 모두 완필했다. 특히 방대한 분량의 경전을 한 자의 오자(誤字)나 낙자(落字) 없이 일관된 필체로 써 내려가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5체를 관통하는 법고창신

풍헌의 예술 세계는 양적인 팽창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서예의 기본인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의 5체에 모두 능통한 정통파 서예가다. 강직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그의 필체는 강원도 정선의 기암괴석처럼 힘이 넘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양강의 물줄기처럼 유연하게 흐른다.


옛 법도를 철저히 익히되(법고), 그 안에 자신만의 개성과 현대적 미감을 담아내는(창신) 과정을 반복했다. 그의 글씨는 가독성이 높으면서도 예술적 결기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병풍 예술의 극치: 풍헌은 특히 병풍 제작에 독보적이다. 수십 폭이 이어지는 병풍 속에서도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의 기운이 동일하게 유지되는 ‘일기성성(一氣成成)’의 경지를 보여준다.


◆찰나를 거부하는 ‘정중동’의 미학

그의 작업실은 시간의 흐름이 바깥 세상과는 다르게 흐른다. 1분 1초를 다투는 디지털 세상에서 그는 거친 숨을 고르고 먹을 가는 데에만 수십 분을 할애한다. 검은 먹물이 벼루 위에서 진득하게 차오를 때 비로소 붓을 잡는 그의 모습은 흡사 전장을 앞둔 장수와 같은 결기가 느껴진다. 특히 수만 자에 달하는 경전을 쓸 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기에, 그는 붓을 잡기 전 명상을 통해 마음을 비우는 ‘정중동(靜中動)’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고도의 절제미는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그의 글씨는 단순히 종이 위에 얹어진 먹이 아니라 종이의 결을 뚫고 지나가는 강렬한 생명력을 품게 된다.


◆고난을 넘어선 수행의 삶

풍헌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공직 생활을 병행하며 서예에 매진했던 초기부터, 퇴직 후 오로지 묵향에만 침잠하기까지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장시간 서서 글씨를 써야 하는 작업의 특성상 허리와 어깨, 손목의 통증은 훈장처럼 따라다녔다. 한여름의 무더위와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그는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았다. 주변에서는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느냐”고 묻기도 했으나, 그에게 서예는 단순한 취미가 아닌 정신적 구원이자 삶의 이유였다. 경전을 필사하며 성현들의 가르침을 몸소 체득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깊은 명상이자 수행이었다.


◆풍헌 서예관, 지역 문화의 보물창고가 되다

그의 열정은 고향인 강원도 정선군에 ‘풍헌 서예관’이 건립되면서 그 결실을 보았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한국 기록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방문객들은 서예관을 가득 채운 방대한 서첩과 병풍을 보며 압도적인 경외감을 느낀다. 풍헌 서예관은 정선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아리랑의 고장 정선이 지닌 또 다른 인문학적 깊이를 보여주는 랜드마크가 되었으며 서예를 배우고자 하는 후학들에게는 살아있는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잊혀가는 ‘느림’의 가치를 향한 일침

풍헌 선생의 고집스러운 필사 여정은 효율성만을 따지는 현대인들에게 소리 없는 일침을 가한다. 클릭 한 번으로 수만 개의 정보를 복사하고 붙여넣는 시대에, 그는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한 자 한 자를 몸으로 익혔다. 


이는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정성과 영혼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가 남긴 방대한 서첩들은 ‘빨리빨리’라는 강박에 지친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는 속도가 아닌 방향에 있으며,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묵향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


◆붓으로 쓴 역사는 영원하다

풍헌 고하윤 서예가는 말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며, 기록은 민족의 힘이다”라고. 그는 현대인들이 쉽게 잊고 사는 ‘기다림’과 ‘정성’의 가치를 묵묵히 실천해왔다.


그가 남긴 1,300여 권의 서첩은 우리 시대를 증언하는 유산이며, 한 예술가가 온몸을 던져 기록한 ‘인간 승리의 보고서’다. 디지털 데이터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시대에 종이 위에 스며든 그의 묵향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며 후대에게 고전의 지혜를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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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4.19 09:29 수정 2026.04.1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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