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가는 장 담그기, 다시 식탁으로 : 고은정의 ‘뚝딱 고추장’이 던진 질문
한국인의 식탁에서 고추장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다. 오랜 시간 장독대에서 발효되며 계절과 시간을 품은 음식, 그리고 가족의 손맛이 담긴 기억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전통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바쁜 일상과 간편식 중심의 식문화는 집에서 장을 담그는 행위를 점점 낯설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출간된 『내가 담그는 뚝딱 고추장』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전통은 반드시 오래 걸려야 하는가. 그리고 간편함은 전통을 훼손하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하는 길일까. 이 책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지만, 오히려 성인 독자에게 더 깊은 고민을 던지는 텍스트로 읽힌다.
고추장은 한국 음식문화의 핵심 요소다. 역사적으로 각 지역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집집마다 맛과 비법이 달랐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는 이러한 전통을 빠르게 약화시켰다. 아파트 중심의 주거 환경은 장독대를 둘 공간을 없앴고, 대량 생산된 제품은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의 자리를 대체했다.
현대인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전통을 포기하는 선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음식이 단순한 ‘소비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장을 담그는 과정에서 얻던 공동체 경험, 기다림의 가치,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는 점차 희미해졌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단순히 “전통을 지키자”는 선언이 아니라, 왜 사람들이 전통에서 멀어졌는지를 이해하려는 접근이 돋보인다.
『내가 담그는 뚝딱 고추장』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의 단축’이다. 기존의 고추장 제조 방식이 수개월의 발효 과정을 필요로 했다면, 이 책은 한두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는 조리법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한 요리법의 변화가 아니다.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고은정 저자는 실제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간편한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체계화했다. 즉,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생활 지혜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다.
특히 계량화된 레시피는 초보자와 어린이에게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손맛’이라는 추상적 개념 대신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진입 장벽을 낮춘다. 이는 전통 음식이 일부 숙련자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화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다.
이 책은 형식적으로는 어린이 요리책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단순한 요리 교육을 넘어선다. 직접 고추장을 만드는 경험은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는 삶’에 대한 교육이다.
성인 독자의 시선에서 보면, 이는 소비 중심의 생활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읽힌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음식이 이미 완성된 상태로 제공되는 현실 속에서, 재료를 이해하고 과정을 경험하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책은 그 빈틈을 채운다. 고추장을 만드는 과정은 단순한 조리가 아니라 작은 자립의 경험이다. 또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요리 활동은 세대 간 문화 전승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빠름’은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빠름이 항상 깊이를 희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담그는 뚝딱 고추장』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잡으려는 시도다.
물론 전통적인 발효 방식과 비교했을 때 풍미나 깊이에 대한 논쟁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접근성’이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완벽한 전통보다,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실천 가능한 방식이 더 지속 가능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노력이 지나치게 크다면, 전통은 결국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담그는 뚝딱 고추장』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다. 이 책은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하나의 문화적 제안이다.
고추장을 한두 시간 만에 만든다는 발상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고민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전통을 지키는 방식이 반드시 과거와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다. 누군가가 계속 만들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한 전통은 살아남는다. 그런 점에서 『내가 담그는 뚝딱 고추장』은 사라져가는 장 문화에 대한 작지만 의미 있는 대답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