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은 너무 깊어서, 처음에는 사랑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서양의 오래된 성화들 속에서도 향유를 든 여인은 종종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지만, 그 침묵의 장면은 늘 강한 질문을 남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왜 아낌없이 쏟아야 했을까. 장재형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설교가 붙드는 핵심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인 이유는,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비추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여인은 매우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은 곧바로 그것을 허비라고 불렀습니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그 말은 이성적이고 정의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행동을 책망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의 한 일도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문은 바로 이 대목에서, 사랑이 계산을
넘어설 때 비로소 복음의 깊은 세계가 열린다고 강조합니다.
왜 이것이 복음일까요.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잘 해 보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자신을 내어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자신을 쏟으셨고, 그 사랑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비효율적이며 어리석어 보일 만큼 철저한 자기 비움이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는
바로 그 십자가 사랑의 그림자처럼 읽힙니다. 한 번 깨진 옥합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고, 한 번 쏟아진 향유는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도
일부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부 내어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여인의 행동을 단순한 감동적인 헌신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묵상합니다.
이 설교가 더 아프고도 깊은 이유는, 바로 다음
장면에 유다의 배반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드렸고, 다른 한 사람은 가장 귀한 분을 팔아넘겼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을
깨달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을 허비로 여겼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극적인 대비를 통해, 신앙의 갈림길이 결국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 곁에 오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많이 들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은혜가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복음을 머리로만 알면 계산이 남고, 복음을
마음으로 받으면 헌신이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도 이 두 사람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든 일상 속에서든, 사랑보다 효율을 먼저 따질 때가 많습니다. 기도보다 결과를, 순종보다 계산을, 믿음보다 손익을 앞세우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옥합은 너무 비싸 보이고, 헌신은 너무 과해 보이며, 누군가의 눈물은 지나친 감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늘 반대로 말합니다. 사랑은 남는 것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설교문이 거듭 상기시키듯,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은 바로 이 어리석어 보일 만큼 깊은 사랑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묵상은 우리에게 단순히 “더 헌신하라”는 도덕적 권면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너는
정말 사랑받았음을 아느냐고. 십자가가 네게 아직도 복음으로 다가오느냐고. 사랑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자기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회개도 여기서 시작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너무 오래 효율의 언어로 판단해 온 것은 아닌지, 복음을 너무 익숙한 종교 문장으로만 다루고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 순간 메말랐던 신학은 다시 살아 있는 묵상이 되고, 멀었던 말씀은 다시 가슴에 닿는 소망이 됩니다.
결국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처럼, 이유를 따지기 전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 배반의 길로 갔고, 여인은 이 사랑을
직감적으로 붙들어 영원히 기억되는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 역시 매일 이 선택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허비로 볼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향기로 받을 것인가.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는, 주님께 드리기 아까워 아직 꼭 쥐고 있는 옥합이 무엇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