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이나 교통망보다 집 주변 일상의 편의성이 주거 선택의 핵심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도보권 카페에서 휴식을 즐기며, 병원과 약국 같은 필수 시설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동네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른바 ‘슬세권’으로 불리는 보행 생활권이 경기도민의 새로운 주거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경기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경기도 내 슬세권 분포를 분석하고, 생활 밀착형 도시정책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슬세권은 슬리퍼를 신고도 이동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안에 편의시설이 갖춰진 생활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걸어서 10분, 약 500m 안에서 일상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2025년 경기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민이 거주지를 선택할 때 편의시설을 중요하게 본다는 응답은 18.2%로 집계됐다. 이는 4년 전보다 4.7%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과거에는 지하철역 접근성이나 출퇴근 여건이 핵심 요소였다면, 이제는 집 주변에서 얼마나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1인 가구 증가가 이러한 변화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경기도 내 1인 가구 비중은 30%를 넘었고, 청년 가구의 절반 이상이 혼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좁은 주거 공간을 대신해 카페는 업무와 휴식 공간이 되고, 편의점은 늦은 시간에도 필요한 물품을 해결할 수 있는 생활 거점이 되고 있다. 동네 자체가 ‘공유 거실’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경기연구원은 경기도 전역을 500m 격자 단위로 나눠 생활 편의성을 분석했다. 그 결과 슬세권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수원시로 83.1%를 기록했다. 이어 부천시 80.7%, 안양시 75.8% 순으로 조사됐다. 이들 지역은 생활 인프라가 비교적 고르게 갖춰져 주민 체감 만족도가 높은 곳으로 평가됐다.
반면 경기도 전체 인구 거주 지역의 약 70%는 생활 편의시설 확충이 필요한 취약 지역으로 분류됐다. 주거지는 형성돼 있지만 주변 상권과 생활서비스가 충분히 따라오지 못한 곳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지역 간 생활 인프라 격차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지적이다.
생활 인프라와 주거 수요의 연관성도 확인됐다. 슬세권 지수가 높은 지역의 전월세 거래 발생 비율은 88.5%로 나타났다. 반면 취약 지역은 5.5%에 그쳤다. 생활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지역일수록 거주 수요와 인구 유입이 활발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기연구원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슬세권 지수가 낮은 지역을 ‘생활권 집중 개선지구’로 지정해 보행환경부터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보행로 개선, 가로등 확충, 거리 환경 정비 등을 통해 주민이 걷고 싶은 동네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비어 있는 상가를 활용해 생활 편의시설을 유치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공공이 임대료 지원이나 리모델링 비용을 보조하면 청년층과 1인 가구가 필요로 하는 업종이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민간 상권 형성이 어려운 지역에는 공공이 초기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이와 함께 주민센터 등에 공유 세탁기와 건조 시설을 설치하고, 편의점이 먼 지역에는 무인택배함과 생활물품 수령 거점을 운영하는 생활서비스 패키지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의료시설이 부족한 곳에는 이동형 의료 서비스를 도입해 기본적인 건강 접근권을 보완해야 한다는 제안도 담겼다.
경기연구원은 앞으로의 도시정책이 대규모 개발 중심에서 주민의 일상 편의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좋은 동네의 기준은 더 이상 교통망만이 아니라, 집 앞 몇 분 거리에서 얼마나 편리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평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