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부동산 신탁은 국내 부동산 개발·금융 시장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담보신탁, 관리신탁, 처분신탁, 토지신탁 등 다양한 형태로 운용되는 부동산 신탁의 핵심 특징은 신탁재산이 수탁자의 고유재산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취급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탁재산의 독립성은 신탁등기를 통해 제3자에게 공시됩니다. 그런데 신탁등기의 대항력이 '신탁원부에 기재된 신탁조항 전반'에 미치는가, 아니면 '신탁재산이라는 사실 자체'에만 미치는가는 실무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대법원은 2025년 2월, 이 오랜 논쟁에 명확한 판단을 내놓았습니다.

법무법인 휘명 박휘영 대표변호사
부동산 신탁의 공시 구조 : 등기부와 신탁원부
부동산 신탁이 설정되면 위탁자에서 수탁자로의 소유권 이전등기와 함께 신탁등기가 이루어집니다. 실무에서 혼동하기 쉬운 점이 있는데, 소유권 이전등기 자체는 신탁등기가 아닙니다. 신탁등기는 등기기록에 신탁원부의 번호를 기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권리이전의 등기와 동일한 순위 번호로 병기됩니다.
신탁원부에는 위탁자·수탁자·수익자의 인적 사항, 신탁의 목적, 신탁재산의 관리·처분·운용 방법, 신탁 종료 사유 등 신탁계약의 구체적 내용이 상세히 기재됩니다(부동산등기법 제81조 제1항). 실무적으로는 신탁계약서 전문이 신탁원부에 첨부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신탁원부는 온라인 열람이 불가하지만 등기소를 방문하면 제3자도 발급받을 수 있으며, 등기기록의 일부로 취급됩니다(부동산등기법 제81조, 제19조).
2024년 9월 부동산등기법 개정으로 등기기록에 신탁재산 거래 관련 주의사항도 추가로 기재하게 되어, 제3자의 신탁 내용 파악이 다소 용이해졌습니다.
기존 대법원의 입장 : 신탁원부 기재 조항 전반에 대항력 인정
과거 대법원은 신탁원부에 기재된 신탁조항 전반에 대하여 대항력을 인정하였습니다(대법원 1975. 12. 23. 선고 74다736 판결). 그 근거는 구 신탁법(2011. 7. 25. 개정 전)이 '신탁은 등기함으로써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고, 구 부동산등기법이 신탁원부를 등기부의 일부로 보고 있으므로, 신탁원부에 기재된 내용도 대항력을 가진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법리는 최근까지도 유지되었고(대법원 2022. 2. 17. 선고 2019다300095 판결 등), 특히 집합건물 관리비 분야에서 자주 문제가 되었습니다. 대법원은 신탁원부에 '관리비는 위탁자가 부담한다'는 조항이 있는 경우 수탁자에 대한 관리비 청구를 배척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대법원 2012. 5. 9. 선고 2012다13590 판결). 이에 따라 많은 신탁회사들이 신탁원부의 해당 조항을 방패삼아 관리비 납부 의무를 면해 왔습니다.
대법원 2025. 2. 13. 선고 2022다233164 판결의 핵심 내용
그런데 이번 대법원 판결은 위와 같은 기존 법리에 중요한 제한을 가하였습니다. 대법원은 현행 신탁법(2011. 7. 25. 법률 제10924호로 개정된 것) 제4조가 구 신탁법과 달리 신탁등기의 대항력을 '그 재산이 신탁재산에 속한 것임을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한정한 점을 주목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대법원은 현행 신탁법 하에서의 신탁등기는 ① 해당 재산이 수탁자의 고유재산과 독립하여 신탁재산을 구성한다는 사실 — 즉 신탁재산의 독립성 — 에 관하여만 제3자에 대한 대항력이 있고, ② 신탁계약 내용이 신탁원부에 기재되어 등기기록의 일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신탁재산의 구성에 관한 사항 이외에는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다만 대법원은 기존 판결이 구 신탁법에 관한 것임을 명시하면서 기존 판결 자체를 변경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구 신탁법이 적용되는 사건에는 종전 법리가, 현행 신탁법이 적용되는 사건에는 이번 판결이 적용됩니다. 실무적으로는 2011년 7월 25일 이후 체결된 신탁계약에는 새로운 법리가 원칙적으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무적 시사점 : 담보신탁과 관리비 문제를 중심으로
이번 판결의 실무적 파장은 특히 담보신탁된 집합건물의 관리비 분야에서 두드러집니다. 담보신탁은 채무 변제 전까지 신탁부동산의 소유권을 보전하다가 채무불이행 시 이를 환가하는 방식으로 운용됩니다. 신탁계약상 부동산의 사용권한과 관리 책임은 통상 위탁자에게 부여되고, 관리비 등 제반 비용도 위탁자가 부담하도록 약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기존 법리 하에서는 신탁원부에 이 약정이 기재되어 있으면 수탁자가 관리비 납부 책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 따르면 이러한 신탁조항은 위탁자와 수탁자 사이의 사적 계약에 불과하여 관리단 등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게 됩니다.
이에 따라 수탁자, 특히 신탁회사는 다음 사항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담보신탁 설정 전 대상 집합건물의 공용부분 관리비 체납 여부를 면밀히 확인하여야 합니다. 집합건물의 공용부분 관리비는 전 소유자의 체납분이 새로운 소유자(특별승계인)에게 승계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신탁 기간 중 위탁자가 관리비를 제때 납부하는지 적극적으로 모니터링하여야 합니다. 위탁자가 관리비를 연체하는 경우, 수탁자는 신탁재산으로 처리하거나 대신 납부 후 신탁재산에서 회수하는 방안을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셋째, 신탁계약을 체결하거나 개정할 때 신탁사무처리비용에 관리비 항목이 명시적으로 포함되도록 하고, 정산 시 최선순위로 집행될 수 있도록 신탁계약 조항을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이번 판결은 분양신탁, 토지신탁 등 다른 유형의 신탁에서도 신탁원부 조항의 대항력에 관한 전반적인 재검토를 촉구합니다. 신탁회사가 신탁원부 조항에 의존하여 제3자에게 대항해 온 다양한 영역에서 이번 판결의 영향이 확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맺음말
대법원 2022다233164 판결은 신탁법 개정의 취지를 충실히 구현한 것으로, 신탁등기의 대항력을 신탁재산의 독립성 보호라는 본래 목적으로 환원시킨 의미 있는 판결입니다. 신탁조항은 어디까지나 사적 계약의 산물이며, 신탁원부를 별도로 발급받아 확인하지 않는 한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제3자를 신탁조항으로 구속하는 것은 거래 안전을 해친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의 방향성은 타당합니다.
신탁 실무에 관여하는 모든 관계자들 — 신탁회사, 위탁자, 수익자, 집합건물 관리단 — 은 이번 판결이 가져온 법적 지형의 변화를 정확히 인지하고, 기존의 신탁계약 구조와 실무 관행을 점검하여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대응하여야 할 것입니다.
필자 소개
박휘영 변호사는 법무법인 휘명의 대표변호사로, 부동산 분양계약 분쟁(지식산업센터·오피스텔·생활숙박시설 등), 집합건물 관리, 재건축·재개발, 집단소송 분야에서 다수의 사건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에이스광교타워1 관리단 관리인으로 재직 중이며, 서울·경기 집합건물 관리 지원팀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