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현충일(Yom HaZikaron) 전야, 예루살렘의 공기는 여느 때보다 무겁다. 하지만 그 무거운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아주 특별한 흐느낌이 있다. 바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이 나란히 앉아 서로의 상실을 위로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공동 추모식’의 현장이다. 총성이 빗발치고 보복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는 중동의 한복판에서, 가해와 피해의 서사를 넘어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공통 분모로 모인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총성 너머의 침묵, 그리고 금기된 만남
2026년 4월, 중동의 지평선은 여전히 불안한 화약고와 같다. 그러나 이 긴장감 속에서도 ‘전투원들을 위한 평화’와 ‘부모 서클-가족 포럼’이 주최하는 공동 추모식은 벌써 21회째를 맞이했다. 이 행사는 단순히 죽은 이를 기리는 자리를 넘어선다. 내 아들을 죽인 이의 어머니를 안아주고, 내 부모를 앗아간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기적적인 ‘공감의 전장’이다.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들을 배신자라 부르고, 누군가는 희생자들의 숭고한 죽음을 모독한다고 비난한다. 팔레스타인 측 상황도 다르지 않다. 점령국과의 협력이라는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들이 국경을 넘고 검문소를 지나 이 자리에 서는 이유는 단 하나다. "죽음 앞에 국적은 없으며, 슬픔의 무게는 평등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실이 잉태한 평화의 씨앗
이 공동 추모식의 뿌리는 깊은 상처에서 자라났다.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은 이스라엘 아버지와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팔레스타인 어머니가 만났다. 처음에는 서로를 증오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지만,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가슴에도 자신과 똑같은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아이가 쓰던 방의 온기,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웃음소리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처절한 그리움이다.
최근 CNN 보도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격화된 갈등으로 인해 추모식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팔레스타인 참가자들의 입국을 빈번히 불허해 왔지만, 이들은 온라인 중계와 제3의 장소를 통해 연결의 끈을 놓지 않는다. 기술의 발달이 전쟁의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이들에게는 증오의 장벽을 허무는 가교가 된 셈이다.
"우리는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행사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증언들은 참혹하면서도 아름답다. 한 이스라엘 여성은 군복무 중 사망한 형제의 이야기를 하며 흐느끼고, 뒤이어 마이크를 잡은 팔레스타인 남성은 가택 수색 중 잃은 어린 딸의 이름을 부른다. 이들의 목소리는 서로 다르지만, 결론은 일치한다. "나의 고통이 당신에게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아니다. 인간 본연의 고결함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정치인들이 영토와 자원을 두고 지도 위에 선을 그을 때, 이들은 눈물로 그 선을 지워 나간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연쇄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칼날은 역설적이게도, ‘함께 흘리는 눈물’임을 현장은 증명하고 있다.
텅 빈 의자 곁에서 부르는 노래
나는 우리 삶의 주변을 돌아본다. 비단 저 멀리 중동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일상 속에서 수많은 보이지 않는 국경을 긋고 살아가지는 않는가.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적’이라 규정하며 날 선 말을 내뱉는 모습이 예루살렘의 총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늘 밤, 이름 모를 팔레스타인 소년의 묘비 앞에 놓인 꽃 한 송이와 이스라엘 병사의 텅 빈 방을 비추는 달빛을 생각한다. 그 차가운 달빛 아래서 두 어머니가 손을 맞잡을 때, 우주는 잠시 숨을 죽이고 진정한 평화의 탄생을 지켜볼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위대해지는 순간은 승전고를 울릴 때가 아니라, 나에게 상처 준 이의 아픔을 내 것처럼 아파하며 곁을 내어줄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