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한정찬의 (진도에서) 죽림리 사람들 외 7편
(진도에서) 죽림리 사람들
사람을 만나면
먼저 바다 이야기가 나온다.
앞바다에 나가면
물빛 속에서
저녁거리가 건져지고
여귀산에 오르면
손끝마다
푸른 잎들이 따라온다고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그들은 안다.
바람의 방향과
흙의 숨결을
반듯하게 누운 논
손때 묻은 밭
소금기 마른 건조장까지
하루가 몸에 밴 사람들
그들은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여귀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처럼
앞바다 윤슬처럼
잠깐 스치고
오래 남는다.
방파제
섬들이 눈앞에 모여 앉아 있다.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테트라포드 하나
낯선 나라에서 건너온 몸처럼
바람을 몰고 휘파람 불다가
가끔, 목이 메어
짧게 울음을 터뜨린다.
한때 펄럭이던 오방색
이제는 색이름만 남고
무사안일을 빌던 손짓들도
바람 속에서 닮아간다.
방파제 끝에 선 늙은 어부
물살을 한참 들여보다가
돌처럼 한마디를 내려놓는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탑리 연가
수려한 능선이 낮게 숨을 고르면
돌로 쌓은 탑들의 시간들이
구릉 위에 빛처럼 흩어져 선다.
비바람 모진 세월 견딘 탑들은
말없이 하늘을 떠받치고
그늘은 사람들 마음에 천천히 스민다.
탑은 오래된 두 손의 간절한 기도이고
탑은 돌아올 사람의 어김없는 약속이며
탑은 지극정성을 담은 영원한 사랑이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밭으로 바다로 나가
흙을 일구고 물을 건져 올리며
탑 아래서 하루를 심고 가꾼다.
저물녘
탑 사이로 내려앉는 고운 빛처럼
희망은 조용히 쌓여서 빛난다.
유채, 남해 섬을 당기다.
사월,
시에그린한국시화박물관 집필실에 들어서자
창살을 밀고 들어와 창문을 두드리는
내 키를 넘는 유채 몇 줄기
꼬투리를 맺으며
가지 끝마다 노란 머리를 흔든다.
나만 유혹받는 줄 알았는데
두 마리 벌이 다녀간 자리
곧바로 한 마리 나비가 이어 앉아
꽃의 깊이를 더한다.
바람이 지나가자
시간이 먼저 흔들리고
비어 있던 공간이
노란 것으로 차오른다.
여귀산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죽림 앞바다 물결이 따라 흔들리고
마침내
진도 하늘 경계가 풀리면서
남해의 섬들이
유채꽃 쪽으로 기울어진다.
진도 쑥
쑥을 뜯는다.
손끝에 스미는 향이
먼저 다녀간 계절들을 불러낸다.
산그늘 눌린 묵은 밭
그곳에 아직도
내 어린 날 하나가 쪼그려 앉아 있다.
쑥은 해마다 같은 얼굴로 돋는데
나는 어느새
일흔의 고개를 넘어
내 그림자도 낯설다.
더부룩하게 번진 초록 앞에 서면
생각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람처럼 흩어진다.
밥이 되고
떡이 되고
때로는 쓴 약이 되어
사람을 살려온 풀.
이 땅의 시간 들이
연한 잎맥 속에 고여 있다.
오늘은
이 오래된 향을 데려다가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이고
쌀가루에 섞어 봄을 버무리고
찹쌀에 섞어
기억을 찧어야겠다.
씹을수록
살아온 날들이
은은히 배어나도록.
고산 제방
바람 먼저 와 닿는 제방 위
돌 하나 흙 한 줌에도
백성의 손때가 켜켜이 스며 있다.
고산, 이름 낮추어
민간의 힘 모아 둑을 쌓고
물길을 다스려 삶을 지켜냈네.
사랑은 말이 아니어서
굶주림을 막는 둑이 되고
백성의 웃음으로 되돌아왔네.
제방 삼거리, 고산 사당 앞
굽은 세월을 견딘 노송 한 그루
그늘 깊은 자리마다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서 있고
하늘을 향해 선 사적비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글자들
그 이름보다 더 크게
그의 마음을 새겨 올려놓았네.
세월은 흘러도
백성의 바램은 변하지 않아
한결같이, 삶을 지켜주는 손을 원한다.
오늘의 위정자들이여
이 둑 위에 잠시 서 보라.
이름이 아니라
남겨야 할 것은
끝내 버티어 주는 업적이다.
남도 진성
바람마저 낮게 숨을 고르는 곳,
남도 진성
굳건한 성 돌 틈마다
말해지지 못한 시간이 스며 있다.
문이라 부르기에도 머뭇한 빈 입구,
그 곁을 지키는 늙은 나무 한 그루
해진 새끼줄에 매달린 사람들 소원은
아직도 바람 속에서 풀리지 않는다.
까치집 하나,
세월을 매달고 가볍게 흔들린다.
이름을 잃지 않으려 돌에 새긴 뜻,
만호의 자리 위에 남은
‘잊지 말라’는 한 줄의 숨결이
바랜 비문 속에서도 또렷하다.
사람들은 떠나고
남은 것은 돌과 바람뿐이지만,
우리는 안다.
저 성이 밤마다 눈을 뜨고
바다 너머를 지켜보던 시간을.
그러므로
기억은 무너지지 않도록 쌓아야 한다.
돌 위에 돌을 얹듯,
마음 위에 마음을 더하여
끝내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
아,
한 시대를 버텨낸 이름 없는 등불들이여.
침묵으로 나라를 지켜낸 자리여.
오늘의 우리가
그 고요를 이어
다시 서 있어야 할 시간이다.
진도 용장성
삼별초가 머물던 자리
외세에 맞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려 했던 의지
궁을 짓고
성을 쌓으며
버텨낸 마음
용장산 기슭에는
무너진 돌들만 남아
그 시대를 조용히 말한다.
지켜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흔적
세월은 멀어졌지만
그때 바람은 아직 차갑고
나는 그 앞에 서서
시린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정찬
□ (사)한국공무원문학협회 고문, (사)한국문인협회원, (사)국제펜한국본부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외
□ 시집 ‘한 줄기 바람(1988)외 29권, 한정찬시전집 2권, 한정찬시선집 1권’ 외
□ 농촌문학상, 옥로문학상, 충남펜문학상, 충남문학대상, 충청남도문화상 외
□ 2022년∼2026년 제1기∼제5기 시에그린한국시화박물관 입주 작가(전남 진도군 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