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모든 시선이 테헤란의 폐허와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선을 좇고 있던 2026년 5월의 둘째 주, 정작 가장 조용한 비명은 가자 지구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한 기자회견장, 마이크 앞에 선 53세의 불가리아 외교관 니콜라이 믈라데노프(Nickolay Mladenov)는 짧은 한마디로 회견장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가자는 사라지고 있다(Gaza is gone).” 트럼프 대통령이 의장을 맡은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 BoP)’의 사무총장이자 휴전 이행을 책임진 그가 입을 떼는 순간, 1월 취임 이후 처음 마주한 카메라들 앞에서 외교적 수사는 송두리째 무너졌다. 5월 13일 수요일,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다섯 글자는 가자 200만 주민의 미래에 새겨지는 영구 분단의 자국이었다.
지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지도를 다시 그릴 뿐이다. 지난해 10월 10일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휴전 합의에서 이스라엘군은 ‘노란 선(Yellow Line)’이라 불리는 분계선까지 후퇴했다. 가자 전체 면적의 약 53%가 그 선 동쪽, 곧 이스라엘 통제 아래 놓이는 구도였다. 그런데 7개월이 지난 지금, 또 하나의 색이 지도 위에 더해졌다. 이른바 ‘주황 선(Orange Line)’이다. 국제구호단체들이 입수한 새 지도에 따르면, 이 선은 노란 선보다 서쪽, 즉 지중해 쪽으로 한층 더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추가로 흡수된 면적은 34㎢, 가자 전체의 11%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가자의 64%를 사실상 장악하게 됐으며, 약 21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주민은 남은 36%의 좁은 띠 안으로 더욱 압축되었다. 색깔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한 민족의 숨 쉴 공간은 다시 한 뼘 줄어든 것이다.
믈라데노프의 경고는 단지 영토의 산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노란 선이 시간이 지나면 “울타리로, 마침내 벽으로 굳어질 수 있다”라고 짚었다. 그 순간 노란 선이 어디였는지, 주황 선이 어디로 옮겨졌는지는 의미를 잃는다. 분단은 잉크가 아니라 콘크리트로, 정치가 아니라 일상으로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휴전선이 70여 년 동안 우리에게 가르쳐 준 비극의 본질이 바로 그것 아닌가. 임시 경계선은 곧잘 영구 국경이 되고, 잠정적인 봉쇄는 어느덧 ‘정상 상태(status quo)’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체념을 먹고 자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상 유지는 누구에게도 선택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를 다루지 않을수록 현상은 더 단단해지고, 그것을 허무는 일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숫자는 차갑지만 정직하다. 휴전 발효 이후 가자에서 이스라엘의 공습 등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인은 팔레스타인 보건부 집계로 850명을 넘어섰다. 휴전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이 ‘평화의 기간’ 동안 가자 하늘은 거의 매일 폭격음으로 갈라졌다. 믈라데노프는 “민간인이 여전히 죽어가고, 가족들은 두려움 속에 살며,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시인했다. 휴전은 ‘상대적 안정’을 가져왔을지언정, 결코 ‘완전한 평화’는 아니었다. 같은 시각 트럼프 대통령과 이스라엘 정부의 시선은 이란의 핵시설과 호르무즈로 옮겨가 있었고, 가자는 ‘세계가 한눈을 파는 사이’ 변두리로 밀려난 비극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평화 설계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한 20개 항(20-point) 평화안은 평화위원회와 미국·이집트·카타르·튀르키예의 4자 중재단을 거치며 50개 항의 실행 문서로 확장됐다. 그 안에는 대규모 재건, 이스라엘군 단계적 철수, 새로운 팔레스타인 통치 기구 출범, 일자리 창출, 그리고 자결권과 국가 수립을 향한 정치적 지평까지 담겼다.
이행 원리는 ‘신뢰가 아니라 상호성’이다. 한쪽이 한 걸음을 떼야 다른 쪽이 다음 걸음을 뗀다. 어긋나면 멈춘다. 다만 그 첫 단추가 단단히 막혀 있다. 바로 하마스의 무장 해제 문제이다. 두 차례 하마스 측과 만났다는 믈라데노프는 “자체 지휘 체계를 가진 무장 분파와 민병대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라며 “하나의 권위, 하나의 법, 하나의 무기(one authority, one law, one weapon)”라는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가자 지구 곳곳에 민병대가 버티고 있는 한, 단 한 채의 학교도, 단 한 동의 병원도 온전히 세워질 수 없다는 그의 진단은 차갑지만 사실이다. 자발적 무기 매입 보상, 무장 해제자에 대한 조건부 사면, 그리고 끝내 거부하는 이들을 위한 ‘안전한 해외 이주’까지 — 출구는 마련됐다. 다만 그 문을 열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까지 이 지난한 협상의 표면을 따라왔다면, 이제는 그 아래의 인간 풍경으로 잠시 시선을 낮추어야 한다. 가자 시티 서쪽 어느 천막촌에서는 오늘도 어머니가 부서진 양철 냄비에 마지막 밀가루를 긁어모으고 있다. 라파 검문소 앞에서는 환자 한 명을 더 보내기 위해 의사가 협상 테이블의 표결을 기다린다. 노란 선과 주황 선 사이, 그 좁은 사선(死線) 위에서 양 떼를 몰던 한 노인은 어느 날 무심한 총소리에 발걸음을 멈춘다. 위정자들이 색의 이름을 다투는 동안, 그 색에 갇힌 사람들은 이름을 잃어버린다. 가자는 단지 ‘분쟁 지역’이라는 라벨이 아니다. 그곳은 일곱 살 소녀가 처음 본 무지개의 색깔이 폭격의 섬광이고, 새벽 기도의 첫음절이 곡소리인 땅이다. 한 영혼의 무게는 1㎢의 면적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