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가 갈라디아서 1장을 바탕으로 바울의 사도성과 복음의 유일성을 균형 있게 해석한다. 율법과 은혜, ‘아나테마’의 의미, 아라비아 3년과 다메섹 소명, 맛디아 선출과의 긴장을 오늘의 교회 현실과 연결해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갈라디아서를 신약 정경 한복판에서 복음의 심장을 지키는 방파제로 본다.
그의 독법은 텍스트의 문장 하나를 과도하게 부풀리지도, 역사적 맥락을 가볍게 지나치지도
않는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이 관례적 인사를 생략하다시피 하며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못 박는 대목은, 이미 본문의 긴장을 충분히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이 첫 문장이
개인적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인간 제도 속으로 환원하려는 흐름에 대한
신학적 대응임을 짚어낸다. 바울이 누구에게서 권위를 받았는가의 문제는 곧 그가 전한 복음이 무엇으로
성립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메신저의 출처를 밝힘으로써 메시지의 출처를 동시에
밝힌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바울의 권위를 체계적으로 흔드는 말들이 퍼져 있었다. 예루살렘 출신으로 보이는 교사들은 바울이 예수의 지상 사역을 직접 동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그를 ‘비공인 사도’로 규정했고, 그의
복음을 ‘정통’에서 벗어난 불완전한 가르침으로 몰아갔다. 장재형목사는 이 전략의 핵심이 메신저를 무너뜨려 메시지를 무력화하는 방식에 있음을 지적한다. 표면상으로는 역사성과 전통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케리그마적 순수성을 인간적 승인 체계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였다. 이 지점에서 바울의 어조가 단호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들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사적인 감정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복음의 유일성을 지키려는 책임감으로 말하고 있다.
그 책임감은 갈라디아서 1장 8–9절의 ‘아나테마’ 선언에서
절정에 이른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이 배타적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선물이 인간의 취향이나 시대의 취향에 따라 변형될 수 없다는 원칙의 표명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권위의 위계 자체를 전복한다. 심지어 천사의 이름을
빌려와도, 이미 주어진 복음을 바꾸려 든다면 ‘권위’라는 말은 더 이상 보호막이 될 수 없다. 진리는 권위를 만들어 내는
기준이지, 권위가 진리를 만든다는 착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오늘의 교회가 붙들어야 할 최소한의 경계로 읽는다. 관용은 필요하지만, 관용이 진리의 윤곽을 지워 버리는 순간 교회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
사도성의 본질을 묻는 문제에서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장의 맛디아 선출과 바울의 자기 변증이 만들어 내는 긴장을 피하지 않는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공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했고, 부활의
증인이 된 자’라는 요건을 세워 제비뽑기로 맛디아를 선출했다. 형식은
완결되었지만, 바울은 첫 번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ἐκτρώματι)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고백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표현을 겸손의 과장으로 보지 않는다. 바울은
절차상의 결격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사도성의 더 핵심적인 요건—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난 증인—을 분명히 한다. 사도직의 기원은
인간의 심의가 아니라 주님의 주권적 선택과 신현이라는 점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사람에게서 난 것”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의 대비로 설명한다. 이때 맛디아를 폄훼하는
의도는 없다. 장재형목사는 표면적·조직적 완결성과 이면적·구속사적 완결성을 구분해, 열둘의 틀은 맛디아로 채워졌으나 이방 선교의
분기점을 여는 마지막 사도의 성격은 바울에게 부여되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제도를 경멸하는 태도가 아니라, 소명의 출처를 더 깊이 묻는 태도다.
바울의 초기 행보는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는 다메섹 소명 직후 곧장 예루살렘으로 향해 공인을 받지 않았다.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
이 3년의 침묵은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의 내적인 교제 속에서 복음을 정초하고 자신의 신학을 세운 시간으로 읽을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시내 산을 아라비아에 둔다고 언급한 점에 주목하며, 율법이 수여된 장소에서 바울이 은혜의 복음을 새롭게 받아 정리했던 상징적 장면을 그려 낸다. 이후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공인 절차를 위한 종결점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음을 사도적 교제 안에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선물이었으며, 예루살렘은 그 선물을 공유하는 형제 공동체였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갈라디아서에서 집요하게 붙드는 초점은 ‘무엇을 믿는가’의 문제다. 갈라디아를
흔든 가르침은 믿음에 더하여 율법 준수—특히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혼합주의였다. 바울은 율법의 역할을 정확히 재배치한다. 율법은
구원을 완성하는 도구가 아니라 죄를 드러내어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선생이다. 아브라함의 의가 율법
이전에 믿음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은,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구원은 거래가 아니라 선물이며, 임금이 아니라 은혜의 증여다. 이 은혜 신학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개적으로 확인되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무는 보편 교회론의 출발점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변증이 지역 교회의 위기를
봉합한 사건에 그치지 않고, 이후 교회가 신학의 기준선을 잡는 데 기여한 결정적 이정표였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왜 오늘, 다시 갈라디아서인가. 장재형목사는 포스트모던 환경에서 등장하는 ‘다른 복음’의 목록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인다. 성공주의는 은혜를 성취의 윤리로
바꾸고, 인본주의는 구원의 중심을 하나님의 행위에서 인간의 가능성으로 옮겨 놓으며,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상대화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바울의 ‘아나테마’는 좁은 배타성의 언어가 아니라, 진리를 인질로 삼는 관용을 거부하는 신학적 용기다. 교회가 진리의
윤곽을 잃으면 사랑도 방향을 잃는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의 유일성과 불변성을 교회의 자의식 중심으로 복원할
때, 비로소 교회가 세속의 가치 체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대안적 현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은 날카로운 비평과 동시에 목회적 온기를 유지한다. 복음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것은 더 많은 금지조항을 나열하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위에 초점을 다시 맞추는 일이다. 바울이 ‘만삭되지
못한 자’라는 자기인식을 은혜의 신학으로 전환했듯, 오늘의
성도도 자격·성과·스펙이 아니라 부르심·약속·은혜를 자랑해야 한다. 우리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not by people, but by God—and 이 단순한 문장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견고한 기초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1장을
개인 방어문이 아닌 공적 선언으로 읽자고 제안한다. 복음은 시대정신의 압력에 따라 수정되는 조항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계시이자 사건이자 선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과
진리, 관용과 분별, 교제와 경계 사이의 긴장을 배우고 감당해야
한다. 때로는 ‘아라비아의 침묵’이 필요하고, 때로는 ‘예루살렘의
교제’가 필요하며, 때로는
‘갈라디아의 경고’가 필요하다. 이 세 가지
리듬이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복음을 맑게 지킨다.
장재형목사의 독법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상보성을 함께 보여 준다. 로마서가 복음의 내용을 정밀하게 설계한다면, 갈라디아서는 그 내용을
왜곡하려는 시도에 맞서 경계를 세우는 현장 보고서다. 내용과 경계, 교리의
명료함과 목회의 신중함이 함께 갈 때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 구도가 살아 있을 때, 바울은 더 이상 먼 시대의 위인이 아니다. 그는 오늘의 회중 앞에
서서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복음을 붙들라고 촉구하는 동시대의 증인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 촉구는 한 개인의 카리스마로 끝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은혜의 선물을 신앙과 공동체의 중심에 다시 고정하는 일로 이어진다.
글을 덮으며 독자는 몇 문장을 자연스레 마음에 새기게 된다.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다. 사도성은 직책이 아니라 부르심에서
시작된다. 율법은 구속의 사다리가 아니라 은혜로 이끄는 교사다. 교회는
친교의 따뜻함과 분별의 날을 함께 품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자랑은 성취가 아니라 은혜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1장을 통해 이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진리를
오늘의 언어로 또렷하게 전하며 묻는다. 우리는 무엇 위에 서 있는가.
우리의 기준은 누구에게서 나왔는가. 우리의 복음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가. 이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는 공동체만이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하나님 나라의 다른 질서를 세상 한복판에서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은 그 길을 가리키는 표지이며, 장재형목사는 그 표지가 지금 여기에서도
읽히도록 도와주는 해설자다. 결국 신앙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복음을,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붙드는 일이라는 고백으로 정리된다. 그 고백이
다시 교회의 중심이 될 때, 바울이 지키려 했던 진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온전히 살아 움직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