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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손으로 세상을 껴안은, 바보 의사 장기려

-애초에 '소유'라는 개념 자체를 삶에서 도려낸 영혼이다.

-그는 눈앞의 가난하고 병든 피난민들을 향한 무한한 긍휼로 쏟아냈다.

-그는 '가진 것'으로 말하지 않고, '비워낸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했다.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텅 빈 손으로 세상을 껴안은, 바보 의사 장기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한평생 '바보'라 불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20세기가 빚어낸 탐욕과 이기, 냉전과 분단의 한복판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가난'이 되었던 사람.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렸지만, 그는 그 이름조차 사치라 여겼다. 그의 이름은 장기려(1911-1995)이다.

 

지미 카터가 '권력'을 버리고 흙으로 돌아갔다면, 장기려는 애초에 '소유'라는 개념 자체를 삶에서 도려낸 영혼이다. 그의 84년 생애는, 쉼 없이 더 많이 가지라고 외치는 이 시대를 향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준엄한 물음이다. 그는 병원을 '소유'한 원장이 아니라, 병원 그 자체가 되어 환자들의 신음 속으로 스며든 사람이었다.

 

얼어붙은 대동강, 45년의 기다림

 

그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는 1950년 12월, 얼어붙은 평양의 어느 길목에 있다. 1.4 후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뒤집혔고, 피난길이 열렸다. 당시 평양의대 교수로, 김일성 주석까지 치료했던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그는, 둘째 아들(장가용) 하나만을 데리고 잠시 남쪽으로 피할 생각이었다.

 

"어머니,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하루 이틀이면 됩니다."

 

그는 아내와 다섯 자녀를 평양의 집에 남겨두고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가 말한 '하루 이틀'은, 살아서는 다시 볼 수 없는 45년이라는 영겁의 세월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산(離散)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통째로 갈라놓은, 살아있는 죽음이었다. 매일 밤낮으로 살을 에는 그리움,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 그는 이 거대한 슬픔의 빚을 어떻게 감당해야 했을까?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대신, 가장 거룩한 연금술을 선택한다.

 

슬픔이 강물이 되어 흐를 때

 

전쟁의 포화가 쓸고 간 부산. 그가 정착한 곳은 천막촌과 판잣집이 끝없이 이어진 절망의 땅이었다. 그는 1951년, 부산 영도에 천막 셋을 치고 '복음병원'의 문을 연다.

 

그의 진료실은, 찢어지는 그리움을 거룩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기도의 현장이었다. 그는 평양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을, 눈앞의 가난하고 병든 피난민들의 얼굴 위로 겹쳐 보았다.

 

그의 청진기는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한 영혼의 신음을 듣는 통로였다. 그는 둑이 터진 강물처럼 밀려오는 그 사무치는 그리움을, 눈앞의 환자들을 향한 무한한 긍휼로 쏟아냈다. 그는 자신의 찢겨 나간 가족을 잃은 대신, 이 땅의 모든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의 병원에는 '뒷문'이 있었다. 돈이 없어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환자들이 밤새 도망칠 수 있도록, 그가 일부러 열어둔 문이었다. 간호사가 "원장님, 또 도망갔습니다!"라고 보고하면, 그는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일부러 열어둔 문인데, 뭘 그리 놀라나. 그 사람이 오죽하면 그랬겠나."

 

그는 자신의 월급 봉투를 단 한 번도 집으로 가져간 적이 없다. 병원 현관에서부터 그를 기다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봉투째 나누어주기 일쑤였다. 보다 못한 병원 직원들이 월급을 재혼한 아내에게 직접 전달하자, 이후 그는 자기 월급에서 병원비를 떼어 환자들을 입원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 '바보'였다: 소유를 거부한 삶, 지붕 하나면 족하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외과의사였다. 마음만 먹었다면 강남의 빌딩을 몇 채라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병원 옥상 4평짜리 사택과, 낡은 의사 가운, 그리고 환자들을 향한 사랑뿐이었다.

 

1968년,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다. "가난한 사람도 돈 걱정 없이 치료받게 하자." 이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이자, 오늘날 전국민 건강보험의 효시가 되었다. 그의 '바보 같은' 사랑은 개인적 자선을 넘어, 사회를 치유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그는 간(肝) 수술의 개척자였다. 그의 칼끝에서 수많은 생명이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누군가 "어떻게 집 한 채 없이 사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맑게 웃으며 답했다.

 

"나에게는 병원 옥상에 비바람 가릴 지붕 하나가 있으니 족합니다. 이 땅에 지붕 하나 없이 떠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어찌 더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는 '가진 것'으로 말하지 않고, '비워낸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했다. 그의 삶 자체가 십자가였고, 그의 존재가 복음이었다.

 

텅 빈 손, 그러나 가장 충만한 이름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그는 이 땅에서 84년의 순례를 마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것이라곤 '청십자조합'이라는 사랑의 제도와, 그가 평생 돌보았던 수많은 환자들의 기억뿐이었다.

 

그의 장례는 그가 평생 섬겼던 부산 복음병원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는 45년간 그리워했던 평양의 아내 곁으로 가지 못하고, 이 땅의 작은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는 비록 이 땅에서 가족과 재회하지 못했지만, 하늘에서 그토록 그리던 아내와 자식들을 품에 안았을 것이다.

 

장기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무엇을 손에 쥐어야 '성공'인지 묻는다. 그는 텅 빈 손이야말로 가장 많은 것을 붙잡는 손이며, 자신을 온전히 비워낼 때 비로소 세상을 가득 채울 수 있음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바보 같은' 삶은, 이 영리하고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거룩한 질책이자, 가장 따뜻한 위로로 남아있다.

 

작성 2025.11.10 15:09 수정 2025.11.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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