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의 수도 테헤란 한복판에서 절망에 빠진 시민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수십 년간 봉인됐던 이름, '레자 샤 팔라비'였다. 통화 가치가 붕괴하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민생을 파탄 내자, 분노한 군중은 과거 왕조의 이름을 소환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경제 시위를 넘어 현 신정 체제의 정통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거리의 구호는 이란 사회를 관통하는 깊은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현대 이란에서 ‘레자 샤’는 역사 교과서 속 인물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체제의 정통성과 직결된, 가장 민감하고 폭발적인 상징이다. 시민들이 그 이름을 연호한 순간, 시위는 불만의 표출을 넘어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전환됐다. 금기의 언어가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체제의 균열을 말해준다. 레자 샤 팔라비는 1925년 왕위에 올라 팔라비 왕조를 열고 국호를 이란으로 바꿨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축출되며 왕정은 막을 내렸다.
이후 들어선 신정 체제에게 팔라비 왕조는 반드시 부정해야 할 구체제의 망령이었다. 혁명의 정당성은 곧 왕정의 전면 부정 위에 세워졌다. 이 때문에 팔라비의 이름은 공적 공간에서 사라졌고, 기억은 억눌렸다. 그러나 경제적 고통이 일상을 잠식하자 시민들은 과거를 다시 불러냈다. 그들의 선택은 향수가 아니라 대비였다. 세속적 근대화와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추구했던 시대를 소환해, 고립과 빈곤의 현재를 비판하는 방식이었다.

거리의 구호를 촉발한 직접적 도화선은 걷잡을 수 없는 경제 위기였다. 국가 경제의 핏줄인 통화 가치가 붕괴하면서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다. 이란 리알화는 전례 없는 속도로 추락했다. 달러당 환율은 145만 리알까지 곤두박질쳤고, 이는 2015년 핵합의 당시와 비교해 10년 만에 화폐 가치가 4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결과였다. 통화 가치의 붕괴는 즉각 생활 물가로 전이됐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식료품과 생필품 가격이 폭등했고, 그 부담은 서민의 장바구니로 직행했다. 우유와 치즈, 계란 같은 기본 식재료 가격이 불과 몇 달 사이 수십 퍼센트씩 뛰었다. 월급 생활자에게 이는 생존의 문제였다.
시민들의 절규는 간명했다. “리알로 받은 월급이 장을 보는 순간 사라진다.” 숫자로 표현된 지표 너머의 고통이 이 한 문장에 응축돼 있었다. 경제 위기는 언제나 정치적 위기를 낳는다. 특히 생존의 위협이 일상이 될 때, 시민의 분노는 체제의 근본을 겨눈다. 테헤란의 ‘레자 샤’ 연호는 왕정 복고의 요구라기보다 1979년 혁명의 유산 전체를 거부하는 상징적 선언에 가깝다. 현 체제가 약속한 정의와 번영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집단적 판단이 거리의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이 외침이 위험한 이유는 명확하다. 신정 체제의 정통성은 혁명의 기억 위에 서 있다. 그 기억을 부정하는 상징이 대중의 입에서 반복될수록 체제는 방어 논리를 잃는다. 경제난이 장기화할수록 상징적 저항은 더욱 과감해질 가능성이 크다. 통제와 탄압은 단기적 침묵을 만들 수는 있어도, 생활의 절망을 해결하지 못한다. 경제 붕괴라는 생존의 위협 앞에서 이란 시민들은 체제의 가장 깊은 상처이자 금기였던 이름을 불렀다. 이는 억눌려온 불만이 더는 통제 가능한 수준이 아님을 보여준다. 테헤란의 외침은 단순한 불만의 소음이 아니다. 벼랑 끝에 선 민심이 신정 체제의 가장 깊은 균열을 흔들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문제는 다음 장면이다.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 한, 금기의 언어는 더 잦아질 것이다. 체제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침묵을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원인을 해소할 것인가. 거리에서 되살아난 한 이름은 이 질문을 이란 사회 전체에 던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