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다
오늘날 우리는 ‘확신’이 권력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의 실체는 모래성처럼 허망할 때가 많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나, 특정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흔히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삶의 거대한 파도가 덮쳐올 때, 우리가 가졌던 그 매끈한 믿음들은 왜 이토록 쉽게 부서지는가?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의 믿음은 당신을 지탱하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이 그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가?
많은 이들이 믿음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도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3,000년 전 고대 히브리인들이 이해했던 믿음은 결코 안락한 의자에 앉아 느끼는 평온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에서 돛대를 붙잡고 끝까지 버티는 처절한 생존의 기술에 가까웠다. 우리는 믿음을 ‘믿다’라는 추상적인 동사나 ‘신념’이라는 고정된 명사로 이해하지만,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대 심리학이 강조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나 '그릿(Grit)'의 원형이 이미 수천 년 전 '에무나(Emunah)'라는 단어 속에 농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나 더 강한 확신이 아니라,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버팀'의 감각이다. 이제 우리는 관념의 감옥에 갇힌 믿음을 구출해, 삶의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으로 복원해야 한다.
척박한 광야에서 길어 올린 언어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 Emunah)’의 어원을 추적하면 ‘아만(אָמַן, Aman)’이라는 동사를 만나게 된다. 이 단어는 ‘지탱하다’, ‘버티다’, ‘확고히 하다’라는 물리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기도 끝에 하는 ‘아멘’ 역시 여기서 유래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유목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삶의 터전은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가 아니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광야였다.
광야에서 텐트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둥이 땅에 단단히 박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때 기둥이 땅을 지탱하고, 땅이 기둥을 받쳐주는 그 견고한 상태가 바로 ‘아만’이다. 또한 이 단어는 ‘양육하는 아버지’나 ‘아이를 품에 안은 보모’를 묘사할 때도 쓰였다. 아이가 부모의 품 안에서 완전히 몸을 맡기고 버티는 상태, 그것이 히브리인이 생각한 믿음의 시각적 형상이었다.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고대 히브리 사회는 거대 제국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위협을 받던 소수 민족이었다. 그들에게 믿음은 고상한 형이상학적 유희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실존적 선택이었다. 흉년이 들고 전쟁이 터지는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믿을 만한(Faithful)’ 존재가 되어주는 것, 즉 약속을 끝까지 지키며 자리를 지키는 성실함이 곧 '에무나'였다. 따라서 에무나는 나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넘어, 관계와 역사 속에서 검증되는 ‘신실함’이라는 사회적 자산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신학, 언어학, 그리고 심리학의 교차점
'에무나'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은 이 단어가 가진 입체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먼저 언어학적 관점에서 볼 때, 히브리어는 헬라어(그리스어)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서구 철학의 기초가 된 헬라어적 사고에서 믿음은 '피스티스(πίστις)', 즉 논리적인 타당성을 바탕으로 한 ‘설득’이나 ‘동의’에 가깝다. 반면 히브리어적 사고에서 믿음은 논리를 넘어선 ‘몸의 기억’이다. 구약학자들은 에무나가 '진리'라는 추상적 개념보다 '진실함'이라는 인격적 태도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사회적 견해 또한 흥미롭다. 현대 사회학자들은 이를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와 연결 짓는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저서 『신뢰(Trust)』에서 고신뢰 사회일수록 경제적 비용이 줄어들고 혁신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히브리인의 에무나는 바로 이러한 상호 신뢰의 원형을 제시한다. 내가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킬 때(Emunah), 타인도 나를 믿고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논리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이를 ‘자기조절 능력’과 연결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이기는 힘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무너지지 않겠다’는 내면의 견고함에서 나온다.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발견한 ‘의미를 향한 의지’는 에무나의 현대적 변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극단적인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버티고 서 있는 자들이 결국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데이터 분석가들이 말하는 ‘회복탄력성 지수’가 높은 사람들의 공통점 역시 상황을 통제하려 하기보다 상황 속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에무나적 단단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믿음은 ‘성적’이 아니라 ‘출석’이다
왜 우리는 '에무나'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가? 현대인의 멘탈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믿음을 ‘결과’나 ‘상태’로만 보기 때문이다. "성공할 것을 믿는다", "병이 나을 줄 믿는다"와 같은 믿음은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 즉각 배신감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에무나의 논리에 따르면 믿음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데이터가 증명하는 성공의 법칙 중 하나인 ‘1만 시간의 법칙’을 신앙과 삶의 태도에 적용해 보자. 탁월함은 영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반복되는 지루함을 견뎌내는 ‘성실함’에서 온다. 히브리어 문맥에서 ‘에무나’가 가장 빈번하게 번역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신실함(Faithfulness)’ 혹은 ‘성실함’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성실(에무나)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라고 노래했을 때, 그것은 신비로운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뜨는 태양처럼 변함없는 신뢰의 관계를 누리라는 뜻이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오직 나의 ‘반응’뿐이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강조했던 ‘통제의 이분법’은 에무나의 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비바람이 부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그 비바람 속에서 텐트 말뚝을 더 깊이 박는 것은 나의 몫이다. 에무나는 바로 그 말뚝을 박는 행위 자체다.
성경에서 모세가 아말렉과 싸울 때 손을 들고 있으면 이기고 내리면 지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때 모세의 팔이 내려가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양옆에서 붙들어 주었는데, 성경은 모세의 손이 ‘해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는 상태를 ‘에무나’라고 표현했다(출애굽기 17:12). 여기서 믿음은 거창한 승리의 함성이 아니다. 팔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해가 질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지독한 버팀’이다. 결국 인생이라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는 가장 똑똑한 자도, 가장 힘센 자도 아닌, 끝까지 팔을 내리지 않고 ‘버틴’ 자다.
당신의 버팀이 곧 당신의 믿음이다
여러분이 지금 붙들고 있는 믿음은 안온한 날씨에만 유효한 장식품인가, 아니면 폭풍우 속에서도 당신의 영혼을 붙들어줄 견고한 닻인가? 3,000년 전 히브리인들이 광야의 모래바람 속에서 발견한 '에무나'는 우리에게 말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투시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정주(定住)의 힘’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빨리 대안을 찾아 떠난다. 직장에서의 갈등, 관계의 위기, 내면의 우울감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놓쳐버리는 것이 바로 이 '에무나'의 근육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나무가 거센 바람을 견딜 때 뿌리는 더 깊어지고 목질은 더 단단해진다. 당신의 삶에 닥친 고난은 당신의 믿음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의 '에무나'를 단련하여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예측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견디며 오늘 하루의 성실함을 쌓아가는 자의 것이다. '에무나'는 당신에게 대단한 기적을 약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이 인생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무릎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당신의 버팀이 곧 당신의 믿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