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칼럼] 쓸모없어질까 두려운 은퇴자에게, 일 없는 삶에서도 존엄은 유지된다

은퇴 후 ‘쓸모 상실 공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성과의 언어를 내려놓고 경험의 언어를 배우다

일 없는 삶에서 존엄을 회복하는 심리적 전환

 

 

 

“나는 이제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걸까.”
은퇴를 앞두거나 막 은퇴한 이들이 가장 자주 속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아침마다 출근하던 시간이 비어 있고, 명함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누군가에게서 걸려오던 전화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사회는 그를 여전히 ‘어른’이라 부르지만,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는 갑자기 사라진다.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백이다.

한국 사회에서 은퇴는 축하보다 상실에 가깝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라는 말 뒤에는, 이제 무대에서 내려오라는 암묵적 신호가 숨어 있다.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 온 세대에게 이 신호는 단순한 직업 전환이 아니라 존재의 흔들림이다. 성과가 곧 나였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과거형이 될 때, 사람은 자신이 사회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이 감각은 단순한 우울이나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쓸모 상실 공포’라는 비교적 명확한 심리 상태다. 여전히 건강하고 경험도 풍부한데, 아무도 그것을 요청하지 않는 상황. 바로 그 간극에서 은퇴자의 존엄은 시험대에 오른다. 하지만 이 시험은 통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관점을 바꿔 다시 읽어야 할 질문에 가깝다.

 

 

성과 중심 사회가 만든 은퇴의 그림자

 

쓸모 상실 공포는 개인의 나약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오랫동안 주입해 온 가치 체계의 부산물이다. 한국 사회는 산업화 이후 “얼마나 기여했는가”, “얼마나 벌었는가”, “어떤 자리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사람을 평가해 왔다. 이 기준은 효율적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가치를 성과로 환원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문제는 이 성과 중심의 평가가 노동 연령을 벗어나는 순간 급격히 무력해진다는 데 있다. 일하지 않는 상태는 곧 기여하지 않는 상태로 오해되고, 기여하지 않는 존재는 ‘쓸모없다’는 낙인으로 이어진다. 은퇴자는 더 이상 경쟁의 장에 서 있지 않지만, 평가의 시선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심리학자 에리크 에릭슨의 이론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노년기를 ‘자아통합 대 절망’의 시기로 보았다. 삶 전체를 돌아보며 의미를 통합할 수 있으면 존엄이 유지되지만, 성취하지 못한 것에만 매달리면 절망이 깊어진다. 성과 중심 사회는 은퇴자에게 통합보다 결산을 강요한다. 인생을 회계 장부처럼 들여다보게 만들고, 손익이 맞지 않으면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게 한다.

또 다른 맥락은 평균 수명의 연장이다. 은퇴 이후의 시간은 점점 길어지는데, 사회적 역할은 그만큼 확장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은퇴자는 ‘아직 충분히 살 만한 시간’을 가지고도 ‘할 일이 없는 상태’에 놓인다. 이 불균형이 쓸모 상실 공포를 더욱 증폭시킨다.

 

 

‘쓸모’는 정말 성과로만 정의되는가

 

쓸모 상실 공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쓸모’라는 개념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쓸모를 생산성과 동일시하지만, 심리학과 철학에서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를 ‘의미에의 의지’라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의미는 반드시 생산이나 성과를 통해서만 얻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돌보는 경험, 자연을 느끼는 감각, 고통을 견디며 태도를 선택하는 과정 자체도 의미가 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도 은퇴자는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가시적인 무대에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지역 사회에서의 조언자, 가족 안에서의 정서적 지주, 공동체 기억의 보관자로서 은퇴자는 여전히 기능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능이 성과 지표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환산되지 않는 가치는 종종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최근 노년 심리 연구에서는 ‘경험 중심 삶’이 은퇴 이후의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보고된다. 목표를 달성하는 삶이 아니라,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삶이다. 이는 게으름이나 무위와 다르다. 오히려 감각과 관계, 사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다.

 

 

성과에서 경험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

 

은퇴 이후에도 성과 중심 사고를 유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을 과거의 기준으로 평가한다. “나는 예전만큼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이 반복되고, 답은 점점 부정적으로 기울어진다. 이 과정에서 자존감은 서서히 침식된다.

반대로 경험 중심 삶으로 전환하면 평가의 기준이 바뀐다. 오늘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오늘 무엇을 느끼고 이해했는지가 중요해진다. 이는 추상적인 위안이 아니라, 실제로 뇌의 보상 체계에도 영향을 준다. 성과 중심 보상은 외부 인정에 의존하지만, 경험 중심 보상은 내부 감각에 기반한다. 후자는 타인의 평가가 줄어드는 은퇴 이후 환경에 더 적합하다.

경험 중심 삶은 다음과 같은 심리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첫째, 시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일정과 마감이 사라진 자리에 리듬과 호흡이 생긴다. 둘째, 관계의 밀도가 높아진다. 업무 관계 대신 선택한 관계가 남기 때문이다. 셋째, 자기 서사가 재구성된다. “무엇을 했는가”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로 이야기의 초점이 이동한다.

이 전환은 훈련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 성과의 언어로 살아온 사람에게 경험의 언어는 낯설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질문이 전환의 출발점이다. 의미는 즉각적인 효용에서 오지 않고, 반복된 경험의 축적에서 만들어진다.

 

 

 

일 없는 삶에서도 존엄은 유지된다

 

은퇴는 쓸모의 종말이 아니라, 쓸모의 정의를 다시 쓰는 시기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났을 뿐,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존엄은 생산량이 아니라 존재 방식에서 나온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나는 아직 쓸모가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삶을 경험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비교를 멈추게 하고, 삶을 다시 현재로 불러온다.

일 없는 삶에서도 존엄은 유지된다. 다만 그 존엄은 성과 보고서가 아니라, 하루를 살아낸 감각 속에 숨어 있다. 은퇴 이후의 삶은 사회적 무대의 퇴장이 아니라, 개인적 무대의 개막일지도 모른다. 그 무대에서는 속도보다 밀도가, 성취보다 경험이 주인공이 된다.

 

 

작성 2026.01.26 05:55 수정 2026.01.26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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