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이 같다고 언제나 같은 곳일까? 수도 한성은 세 곳
서울이란 지명의 내력
서울이라는 이름이 우리 국민들에게 꽤나 다정하게 느끼는 지명이지만,
언제 왜 그 이름이 수도 이름으로 되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조선시대 수도가 한성이었음을 모르는 사람도 없어,
같은 곳을 서울이라 하니 수도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인 듯하다.
그 서울이 우리도 모르게 정해진 것이라면?
일본 총독에게서 1945년 9월 9일 항복문서를 받은 미군사령관 하지는
컬로프 소령을 시장으로 임명하나 경성이란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경성이란 지명은 일본이 ‘한성’이라는 조선 수도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경기도 아래 관할로 두며 명명하였던 유쾌하지 않은 지명이다.
그 굴욕적 이름이 그대로 쓰이다, 다음 해 1946년 8월 14일 미군사령관 러쉬 소장이,
道(도)와 동격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서울시 헌장’을 제정하며,
그 1조에 우리나라 수도이름을 ‘서울’로 정하고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군정청 사람들에게 ‘서울’이름이 익숙하여 그렇게 되었다 한다.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전인 조선 말에도 이미 서울이라는 말을 써왔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토 주권을 빼앗기고 경성이라는 지명을 사용되었고,
왜 서울이 되었는가, 논리도 논의도 없이 미군정청이 정한 대로 사용할 뿐이란다.
백제의 한성은 거짓이고, 북한의 평양이 한성이라면?
어쨌거나 漢城(한성) 또한 우리 국민들에게 꽤나 익숙한 지명이다.
그리고 ‘옛날부터 우리 수도’로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가까운 시대에 부르던 호칭이라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더욱이 백제 때부터 수도의 역할을 하였다고 알고 있어 한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런데 이 백제 한성이라는 교육이 거짓을 가르친 것이라면?
그런 국민에게 현재 북한 땅의 평양이 고구리 때 평양이 아니고,
고구리의 별도였던 한성이라고 하면 대부분 깜짝 놀람을 지나서,
필자를 미친 사람이라 나무랄 것 같아 걱정된다.
지금의 서울인 한성은 조선 때만 한성이었다.
고구리 때는 사서인 삼국사에만 존재하였고
위치는 몰랐던 고구리 별도 한성이 북한 평양에 있었으며,
백제의 한성은 우리 인식 범위 속에 들어오지도 못하였다.
다만 지나 대륙 산동성 서북 경계에 위치한 덕주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 추정의 합리화를 위하여 사서의 기록을 들추어 보자.

고구리 別都(별도) 한성
백제의 한성은 잠깐 뒤로 미루고, 고구리 別都(별도) 한성을 먼저 간단히 논하여 본다.
여기의 주제가 아니므로 짧게 언급한다.
1913년 평양에 도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대동강과 맞닿는
내성 동벽을 허무는 바람에 세상에 드러난 石刻(석각)이 있었다.
엉뚱하게 한성이 새겨져 있었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後卩小兄文達, 節自此西北行涉之.
병술년 12월에 漢城(한성) 하후부의 소형 문달이 여기서부터 서북 방향을 맡는다.
이 명백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사학자들은 무엇 때문인지,
평양이 고구리 때 별도인 한성이라는 사실을 좀체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한성이 확정되면 그들이 철석같이 신봉하는
식민주의 사학에 금이 갈 것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덧붙이자면 병술년을 평원왕 8년으로 학계에서 단정하는데, 필자는 크게 의심한다.
이처럼 누가 축성 책임자였으며,
공사 책임 구역까지 명시하는 각석과 함께 발굴된 각석인지라,
한성이 아니라고 부정할 증거는 전혀 없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현재의 한강이 南川(남천)이라고 하였다
흔히 명필로만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는 대단한 금석학 학자이기도 하였다.
그가 어째 북한산에 비석이 있는지 알게 된 내력이야 모르겠지만,
등산화도 없던 시절 그 험한 바위에 올라 그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였음을 밝혔다.
순수비라면 ‘위대한 왕인 내가 다스리는 영역을 밝히려고 여기 왔노라!’
하고 자랑하는 비인데 왜 사람이 잘 가지도 않을 바위산 꼭대기에 자랑하는 비를 세웠을까,
필자는 젊었을 때 매우 힘들게 가끔 올라가며 가짜일 것이라 의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다녀갔음을 밝히는 내용이라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니 그 문구를 확인한다.
그런데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남천’
… 眞興太王及衆臣等, 巡狩▨▨之時記.
~~~ 衆路過漢城 陟~~~ 內夫智一尺干, 沙喙另力智迊干, 南川軍主沙 … 夫智及干 ~~~
진흥태왕 및 중신들이 ▨▨을 순수할 때에 기록하였다.
~~~ 한성에 이르는 길에 올라 ~~~ 내부지 일척간, 사훼의 무력지 잡간이다. 남천군주는 사〈훼의〉 ~ 부지 급간 ~~~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568년 10월 이후일 것이라 하여,
호동왕자가 낙랑공주로 하여금 낙랑국의 자명고 찢는 일로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고구리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500년 이후 신라의 영토로 바뀌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고로 고구리 별도였던 한성은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오늘날 서울은 이렇다할 도회가 없었으므로
‘한성에 이르는 길’이라야 진흥왕순수비의 내용이 이해되는 것이다.
(‘한성을 지나치는 길에’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아래와 같은 한성의 조건과 어울리지 않는다.)
더 중요하기는,
이 소제목의 주제인 ‘남천’이 오늘날의 한강일 것임은 쉽게 이해된다.
즉 북한산에서 남천이라 거론할 물길은 오늘날의 한강밖에 더 있겠는가?
설마 홍제천일 리도 없고, 조선 때 인공적으로 팠던 청계천을 말할 까닭은 없는 것 아닌가?

백제 한성이 갖추어야 할 조건: 서울에는 없다
온조가 남으로 내려와 부아악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데,
“북으로는 漢水(한수)를 띠고 동으로는 高嶽(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를 격한 땅”을 선택한다.
이 기록으로 보면 다른 조건은 결정적이지 않으나 ‘漢水’만은 분명한데,
다음 기록은 이 땅의 한강으로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 백제본기 개로왕 편에 한성의 조건과 그가 이룩한 건설업적을 보자.
十八年, 遣使朝魏 ~ “臣立國東極, ~”
18년(472)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 ~”
二十一年 秋九月 ~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即於其内作宫校·樓閣·臺榭,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虵城之東, 至崇山之北.
21년(475) 가을 9월 ~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과 누각과 전망대와 건물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에서 큰 돌을 가져다 덧널[槨]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의 동쪽에서부터 숭산의 북쪽에 이르렀다. ~.
至是, 髙句麗對盧 齊于·再曽桀婁·古尓萬年 再曽·古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 제우·재증걸루·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北城(북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南城(남성)을 공격하니 성 안에서는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
이 인용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눈길이 간다.
1) 한성의 위치가 동쪽 끝이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백제편에도 똑같은 기사 등재됨).
2) 벽돌이 건설의 주재료였다.
3) 사성 동쪽부터 숭산 북쪽까지 하수를 따라 뚝을 쌓았다.
4) 이 사건으로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의 한성에는 북성과 남성이 각각 있었다.
생각해 보자.
1) 오늘날의 서울이었다면 절대로 동쪽 끝이라 표기할 수 없다.
2) 이 땅에서는 극히 예외적 건축물을 제외하면
화강암이 주된 건축 재료일 뿐, 벽돌 건축은 거의 없었다.
3) 사성의 위치는 추적이 되지 않았으나, 崇山(숭산)이 우리나라 한강 주변에는 없지만,
중공에는 고대로부터 5악 중 中嶽(중악)으로써 유명한 산으로 낙양과 정주 사이에 존재한다.
현대에도 소림사가 있어 그 명성은 여전하다.
4) 백제 당시는, 漢(한)나라에서 발원하였다고 漢水(한수)였을 수 있는, 황하에 면하여 있다.
더욱이 백제 漢城(한성)일 수 있는 오늘날 산동성 서북쪽의
德州(덕주)가 장위신하로 불리는 물길이 관통하며 나뉘어 있다
(그들은 후대에 인공적으로 만든 운하라고 주장한다).
5) 흥미롭게도 삼국사 등에 등장하는 지명이 꽤 많다.
바로 남쪽에는 平原(평원)과 黃山(황산), 서남쪽에 淸河(청하),
더 서남쪽으로 오도독부의 하나였던 東明(동명),
동북쪽으로 滄州(창주), 서북쪽으로는 石門(석문, 현재는 석가장에 묻혀 있음. 대방과 접한 곳)과
安平(안평) 등이 있어 삼국의 영역이었음을 명확하게 뒷받침한다.
漢城(한성)이란 글자가 갖는 뜻과 德州(덕주)
漢城(한성)의 漢은 ‘놈’과 함께 ‘클’이라는 두 뜻이 있다. 그런데 지나인의 北史 백제 편에
백제의 수도는 居拔城(거발성) 또는 固麻城(고마성)이라고 부른다.
고 하였다. 고마성은 웅진을 가리키는 것일 터인데, 거발성은 한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마’는 ‘곰’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어 ‘웅진’일 듯한데, 거발성은 유추가 많이 필요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시대 이전 환웅시대의 첫 환웅이 ‘거발한’이시라
이를 수도명으로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발한은 언어학에서 音(음, 소리)을 再構(재구)하는 규칙을 따르면 ‘크게 밝은 임금'
(干; 간, 한, 칸, 가한, 카간 등의 소리가 있음)이란 뜻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
여기서 한성의 한의 크다는 뜻과 접점이 만들어지며, 德州(덕주)의 덕과 만나게 된다.
德(덕)이란 惠(혜)로써 ‘큰’이라는 뜻이 바탕이기 때문이다.
산동성 덕주를 백제 한성이라고 단정할 수 없더라도,
오늘날의 서울은, 앞에서 언급한 조건과 일치하는 곳이 거의 없어,
백제의 한성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막무가내로 오늘날의 한강을 한수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진흥왕순수비의 ‘남천’조차 부정할 수는 없다.
이제 서울이 백제의 한성이었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되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