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서 왔는가?” 예루살렘의 혼란 속에 선 예수, 요한복음 7장의 충격적 선언
요한복음 7장 25-36절은 초막절이 한창이던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벌어진 논쟁을 기록한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안다고 생각하는 확신이 오히려 진리를 가로막았다. 예수는 그들의 말에 응답하며 외쳤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이 장면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예수를 알고 있는가, 아니면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가.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의 성장 배경을 알고 있었다. 갈릴리 출신, 나사렛 사람, 목수의 아들. 그들은 외형적 정보에 익숙했다. 그래서 단정했다.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정보는 신앙적 통찰이 아니었다. 예수의 육신적 출신만 보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본질은 보지 못했다.
예수는 선언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여기서 드러나는 핵심은 ‘관계’다. 예수는 아버지를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군중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보내신 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신앙의 가장 큰 위험은 무지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확신이다.
요한복음은 ‘보냄’의 신학을 강조한다. 예수는 스스로 온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다.
군중은 메시아를 정치적 해방자로 기대했다. 로마의 압제를 끝낼 인물, 눈에 보이는 권세를 행사할 지도자.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영적 구원자로 오셨다.
그 간극이 오해를 만들었다.
이 장면은 단지 1세기 유대 사회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자신의 기대와 욕망에 맞추려는 시도는 반복된다. 예수가 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길 기대하지만, 그분의 주권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다.”
이 선언은 시간의 제한을 의미한다. 은혜에는 기회가 있고, 그 기회는 영원히 열려 있지 않다.
본문은 흥미로운 표현을 기록한다. “그들이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여기서 ‘때’는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을 의미한다.
예수의 생명은 군중의 분노나 종교 지도자의 음모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다. 십자가조차도 우연한 비극이 아니라, 정해진 하나님의 계획 속 사건이었다.
이 사실은 신앙인에게 깊은 위로가 된다. 세상이 흔들리고 억울함이 닥쳐도, 하나님의 때가 있다. 인간의 공격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 있다.
붙잡으려 했으나 잡히지 않았던 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분노를 넘어선다는 선언이다.
예수는 마지막으로 엄중한 경고를 남긴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내가 있는 곳에 오지 못하리라.”
이는 단순한 공간적 이동의 문제가 아니다. 영적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채, 자기 확신 속에 머무는 사람은 결국 예수를 찾지만 만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신앙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은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분의 뜻에는 순종하지 않는 상태다.
예수는 문을 두드리지만, 문을 여는 것은 인간의 응답이다.
이 본문은 오늘의 교회와 성도에게 묻는다. 우리는 예수를 정보로 아는가, 인격으로 아는가. 우리는 그분의 출신을 아는가, 아니면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아는가.
예루살렘 군중의 질문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한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신앙의 고백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 그 사이에서 인간을 향해 구원의 길을 열었다.
문제는 정보가 아니라 관계다.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다.
요한복음 7장 25-36절은 우리를 선택의 자리로 부른다. 안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참으로 알 것인가.
예수를 향한 질문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리고 그 답은 각자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