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년 하테루마 타카야스(波照間高康)가 야에야마(八重山) 제도에 사츠마이모(고구마)를 도입한 사건은 단순한 농작물 전파가 아니라 지역 민중의 생존과 직결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야에야마는 태풍 피해가 잦고 농업 환경이 열악한 변방 지역이었으며, 동시에 류큐 왕부와 사쓰마 번의 인두세(人頭税) 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쌀을 거의 소비하지 못했고, 고구마와 해초가 사실상 유일한 식량이 되었다.
또한 인두세 부담은 영아 살해라는 비극적인 풍습까지 낳았으며, 1771년 메이와 대쓰나미(明和の大津波) 이후에는 고구마가 생존을 지탱하는 핵심 식량이 되었다.
1694년 하테루마 타카야스(波照間高康)는 야에야마 제도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도입하였다. 야에야마는 류큐 왕국의 최남단 및 최서단에 위치한 섬 지역으로, 오키나와 본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농업 기술의 도입이나 새로운 작물의 보급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지역은 태풍의 길목에 위치하여 농작물 피해가 매우 잦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비바람과 가뭄에 비교적 강한 고구마가 도입된 것은 야에야마 민중들에게 중요한 변화였다.
하테루마 타카야스가 보급한 고구마는 야에야마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식량 부족 문제를 일정 부분 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고구마 도입이 곧바로 민중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지는 못했다.
당시 야에야마 지역은 1637년부터 류큐 왕부와 사쓰마 번의 인두세 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인두세는 토지 면적이나 생산량과 관계없이 15세부터 50세까지의 남녀 모두에게 머릿수를 기준으로 부과되는 세금이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야에야마에서 생산된 쌀과 곡물은 대부분 지방 관리와 류큐 왕부에 의해 거둬졌다. 그 결과 생산자인 하층 민중들은 자신들이 재배한 쌀을 거의 먹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고구마와 그 잎, 그리고 해초는 민중들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사실상의 유일한 식량이 되었다.
야에야마 사람들에게 고구마는 단순한 주식이 아니라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연명의 수단이었다.
고구마 보급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야에야마 지역의 생산력과 인구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인두세 체제 속에서 새로운 비극으로 이어졌다.
인두세는 사람 수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자녀가 늘어날수록 가정이 부담해야 할 세금이 증가하였다. 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부 가정에서는 인구를 줄이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살해하는 영아 살해(嬰児殺し)라는 비극적인 풍습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랜 기간 이어졌으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야에야마 지역에서 계속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메이와 대쓰나미와 고구마 의존 생활년 야에야마 제도는 메이와 대쓰나미라는 대재난을 겪었다. 이 쓰나미는 해저 화산 폭발로 발생한 거대한 해일로, 야에야마 지역에 큰 피해를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약 9,313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쓰나미 이후에는 기근과 질병이 이어졌다. 그러나 류큐 왕부는 야에야마 지역에 충분한 구호 곡물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망자의 인두세까지 생존자들에게 부담시키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에야마 민중은 극심한 식량 부족과 노동 부담을 동시에 겪게 되었다.
이 시기 민중의 생존을 유지하게 한 식량 역시 고구마였다. 고구마는 재해 이후에도 비교적 재배가 가능했기 때문에 야에야마 사람들에게 중요한 생존 작물이 되었다.
1694년 하테루마 타카야스가 야에야마 제도에 도입한 고구마는 이 지역의 농업과 식량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물은 인두세 체제 속에서 쌀을 빼앗긴 민중들이 생존을 위해 의존해야 했던 식량이기도 했다. 영아 살해라는 비극적 풍습과 메이와 대쓰나미 이후의 재난 속에서도 고구마는 야에야마 사람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작물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류큐 왕국의 해상 무역과 정치 구조 이면에서 낙도 지역 민중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