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異日) 시인의 시집 『다른 날을 꿈꾸다』는 지나온 시간 속에서 남겨진 감정과 기억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시집이다. 바람이 부는 저녁, 비가 개인 아침, 바다와 모래언덕 같은 풍경 속에서 삶의 흔적을 발견한다. 시인은 자연의 이미지와 일상의 장면을 통해 인간의 시간과 기억을 조용히 풀어낸다.
시집 곳곳에는 이별과 기다림의 정서가 흐른다. 그러나 그 감정은 격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떠난 자리와 남겨진 시간이 담담한 언어로 이어지며 오래 남는 여운을 만든다. 또한 노동의 하루, 새벽 전철역, 출근길 같은 장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시인은 그 평범한 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다른 날을 꿈꾸다』라는 시집 제목처럼 사람은 늘 지금의 시간을 살면서도 다른 날을 생각한다. 지나간 날을 돌아보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떠올린다. 이 시집은 그 사이에 놓인 마음의 결을 조용히 보여준다.
천천히 읽다 보면 시 속의 풍경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그런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시집이다.
<작가소개>
시인 이일(異日)
1957년 부산에서 출생, 아명은 준호, 본명은 철규로 지인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더 가까운 사람들에게 日念이라는 藝名을 알리기도 했으나 이제 모두에게 異日로 남고자 합니다. 산업의 역군을 강조하던 시대의 유혹에 충실했던 지인의 강력한 권유로 공고 기계과를 1976년 졸업하긴 했으나 아주 짧은 공장 근무 외에는 생산직에서 땀을 흘려본 일이 없었고 쇼핑몰에서 노래 테이프와 필름을 파는 일을 몇 년 정도 하다가 경영학과로 진학했으나 전공인 雜學에는 뜻이 덜했고 시대의 아픔을 핑계로 아침부터 술만 마시다 졸업했던 기억이 여전하군요. 그 시절 나온 시가 『전보』와 여기 실린 『窓』과 『나팔꽃』이 있습니다. 잔치가 끝난 서른 이후에야 대학교를 졸업했고, 맥주 회사, 감정평가 회사, 택시 회사, 건축구조 회사 등을 일터로 삼고 살았습니다.
예순여덟 번째 이 봄도 속절없이 가고 나면 그리웠다는 말도 잊어버리고, 기다린다는 말도 잃어버리고 사랑했던 마음만 하얀 머리카락으로 남았습니다.
<이 책의 목차>
제1부. 다른 날을 꿈꾸다
窓
나팔꽃
廣場
저녁에
거미를 위한 助言
촛불
빈터
眞空妙有 - 劃
다른 날을 꿈꾸다
獨白
悲歌
새벽비
비 개인 아침
찔레
沙丘
夢遊桃園圖
絶命島
無題
제2부. 함께이던 시절은 다 지나가는 손짓이더라
像
깊은 하늘
함께이던 시절은 다 지나가는 손짓이더라
마음
강변
絶望 以後
시작과 끝
거울
餘命
빛과 그림자
겨울비
해당화
生
자화상
촛농
편지 (1)
편지 (2)
젊음
제3부. 이별 이후
겨울새
사구
눈이 내리고
단풍
어슷썰기
담배
車窓外境
파도
이별 이후
빈 마음
오아시스
소나기
자벌레
剝製
마임
日當
묘지
未明
제4부. 오래된 오늘
희망사항
오래된 오늘
파도
오로라
출근길
풍경
타령
里程標
가을밤
꽃
獨白
離別의 아침
自畵像
겨울 바다
뿌리내리기
<본문 詩 ‘나팔꽃’ 전문>
우리들이 만나서 부대끼는 소리는
반쯤은 물에 젖은 모습이다
손가락 두 마디쯤이면
살아날 듯도 한 소리로 펼쳐진 뜨락에서
누군가 성대 절개 수술 중이다
메아리로 지치던 산천은
스치는 바람으로 무너져 내리는데
찬란한 유월의 어느 아침
벙어리 된 채로
들리던 소리마저 잃기 위하여
귀마저 막아버렸을 때
그제야 일어서는 내 것인 그대
그대인 빛 소리
<추천사>
이일(異日) 시인의 시집 『다른 날을 꿈꾸다』를 펼치면 먼저 시인의 짧은 고백을 만나게 된다. 삶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 채 살아온 것처럼 시 또한 무엇인지 단정할 수 없었기에 남은 것은 물음표를 닮은 몸짓뿐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말은 이 시집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일(異日)의 시는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마음에 남은 장면들을 하나씩 꺼내어 놓는다. 그 장면들은 특별한 사건이 아닐 때가 많다. 바람이 부는 저녁, 비가 개인 아침,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처럼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작은 순간 속에서 오래 남는 감정을 발견하고 독자에게 전달한다.
시집의 첫 시 「窓」에서 우리는 그런 시인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겨울바람이 부는 벼랑 위에서 커튼을 내리면 투명한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깨어난다. 기다림이 지쳐버린 자리에서도 그리움은 끝나지 않은 채 흔들린다. 그의 시는 그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장면을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 풍경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바다와 바람, 모래와 별빛 같은 자연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풍경들은 시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시인의 생각과 감정을 담는 자리로 놓여 있다. 예를 들어 「沙丘」에서는 밀물과 썰물의 흐름 속에서 삶의 시간을 바라본다. 바다의 움직임처럼 사람의 삶도 끊임없이 오고 가며 흔적을 남긴다. 닿을 것 같던 밑바닥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시인의 고백 같은 구절은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느끼게 되는 막막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집에서 자주 만나는 또 하나의 정서는 이별과 기다림이다. 「눈이 내리고」나 「이별 이후」 같은 시에서 떠난 자리와 남겨진 시간이 조용히 이어진다. 시인은 이별의 감정을 남겨진 풍경을 통해 그 시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 속의 먹먹함은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는다.
일상의 장면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도 인상적이다. 「日當」에서는 새벽 전철역에서 시작되는 노동의 시간이 등장한다. 하루를 나누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이어간다. 특별한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아도 그 장면만으로 삶의 무게가 전해진다. 이 시집의 여러 시들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 속 풍경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시집의 뒤쪽으로 갈수록 시인의 시선은 더 담담해진다. 「뿌리내리기」에서는 희미해진다는 것은 언젠가 또렷했다는 뜻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며 많은 것들이 흐려지지만 그 흐릿함 또한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느껴진다.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세계는 바로 그런 시간의 풍경이다.
『다른 날을 꿈꾸다』라는 시집 제목도 그런 의미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사람은 늘 지금의 시간을 살면서도 다른 날을 생각한다. 지나간 날을 돌아보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시인의 시선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독자 역시 자신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 차분한 시선이 이 시집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된다.
(이일[異日] 시집 / 보민출판사 펴냄 / 변형판형 / 96페이지 / 값 12,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