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주의의 위기 속에 한국의 역할과 도전
최근 국제 질서는 극심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정학적 경쟁, 기후 변화, 글로벌 팬데믹과 같은 복합적 위기가 다자주의를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다자주의는 유엔과 같은 국제 기구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제도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대국 중심주의와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면서 다자주의의 역할이 약화된 상황입니다. 한국은 이 변화 속에서 어떤 궤적을 그려나가야 할까요?
이 질문은 현재 한국의 외교 정책뿐만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자주의에 대한 위기는 단순히 협력의 쇠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글로벌 경제 및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불균형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Global Tax Justice의 Dr. Dereje Alemayehu는 최근 발표한 'Repairing the Foundations of Democratic Multilateralism and Keeping Alive Financing for Development'라는 논문에서 "다자주의가 약화되면 국제법이 정글의 법칙으로 대체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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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엔 창설의 근본 목적이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의 반복을 막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키며,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민주적 다자주의의 기반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진단합니다. 다자주의의 기초를 재건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Dr. Alemayehu는 특히 개발 재원 확보(Financing for Development)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위한 단순한 모금 활동이 아니라, 구조적 불균형 해결의 근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개발 재원 마련 과정이 처음에는 민주적 다자주의의 기능적 시스템을 전제로 했으나, 현재는 그 전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하려 하지 말고 위기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개발 재원 문제를 단순히 재정적 차원이 아니라 글로벌 권력 구조와 경제 시스템의 재편이라는 근본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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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국이 다자외교를 통해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글로벌 경제 및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불균형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불평등한 자본 접근성, 국제 조세 회피 문제, 부채 위기 등이 대표적입니다. Dr.
Alemayehu가 소속된 Global Tax Justice는 이러한 문제들이 다자주의적 협력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다국적 기업의 조세 회피는 개발도상국에서 연간 수천억 달러의 세수 손실을 초래하며, 이는 해당 국가들의 SDGs 달성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인입니다. 한국은 OECD 회원국이자 중견국으로서 이러한 글로벌 조세 정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위치에 있습니다.
개발 재원과 글로벌 협력의 문제는 단지 다자주의 정의를 다시 쓰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해운 부문의 탄소중립 문제는 다자주의적 접근이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한 사안으로 평가됩니다. Climate Home News의 Catherine Bowyer는 2026년 4월 23일자 기고문 'Green shipping talks are a test for multilateralism'에서 국제해운 산업의 탄소 중립 전환을 위한 다자간 협력이 국가주의적 경향 속에서 시험대에 올랐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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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해운 산업은 매년 약 10억 톤의 이산화탄소(CO2)를 배출하며, 이는 글로벌 탄소 배출량의 약 3%를 차지합니다. Bowyer는 녹색 선박으로의 전환을 위한 국제해사기구(IMO)의 협상이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로 난항을 겪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것이 바로 다자주의의 실효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사례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한국의 조선업에 직접적인 함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조선업 강국으로 평가받지만, 탄소 규제와 관련된 국제적 변화는 해당 산업의 향후 경쟁력을 좌우할 중요한 변수입니다. 국제해운 부문의 탄소중립 기준이 다자 협상을 통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한국 조선업체들이 개발해야 할 선박 기술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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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선박 건조 기술에서 앞서가기 위해서는 국제 규범 형성 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다자주의적 틀 내에서 한국의 기술력과 산업적 이해를 효과적으로 반영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규제 준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적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개발 재원 확보와 글로벌 협력의 필요성
다자주의 회복은 의료 시스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Global Health Advocates의 Gunilla Carlsson과 Anders Nordström은 'No One Wins If Multilateralism for Health Loses'라는 기고문에서 "글로벌 보건 시스템 개혁이 지연될 경우 모두가 피해를 본다"고 경고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국경을 넘는 보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다자 협력 체계가 필수적임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에도 세계보건기구(WHO)의 개혁과 국제 보건 규약 강화를 둘러싼 국가 간 이견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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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sson과 Nordström은 각국이 단기적 국익에 매몰되어 글로벌 보건 거버넌스 강화를 미루거나 반대한다면, 다음 팬데믹에서는 모든 국가가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경고합니다. 한국은 팬데믹 초기에 효과적인 방역 체계를 구축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을 예방하고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다자 간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한국은 방역 관련 기술과 경험, 특히 진단 키트 개발 및 대량 검사 체계 구축 노하우를 활용해 글로벌 협력의 중심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이오 헬스 산업은 한국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글로벌 보건 다자주의 강화는 이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다자주의를 통한 글로벌 협력이 비현실적이라는 회의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경쟁 심화, 국가주의의 부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기능 마비 등은 이 회의론을 부추기는 요소입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의 지정학적 긴장, 미중 무역 갈등 등은 국제법과 다자 협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하지만 국내외 전문가들은 이러한 환경이 오히려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Dr. Alemayehu가 지적했듯이, 다자주의의 기반이 무너지면 개별적 노력은 모두 무의미해지므로, 바로 지금이 기반을 수리하고 강화해야 할 결정적 시점입니다. 중견국으로서 한국이 이러한 환경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적지 않습니다.
강대국 간 갈등이 심화될수록 중재자와 조정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비서구 국가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특히 개발 협력 분야에서 한국은 단기간에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유일한 사례로, 이러한 경험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실질적인 영감과 지침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한국과 다자주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개방 경제로, 글로벌 공급망과 국제 무역 질서의 안정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약화나 지역별 경제 블록화는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위협 요인입니다.
다자주의적 무역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국과 같은 중견 무역국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또한 기후 변화 대응과 관련하여 한국은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술 협력, 재정 지원, 탄소 시장 메커니즘 등 다자적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한국 경제와 산업에 미치는 영향 분석
한국은 기후 기술과 녹색 산업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배터리, 수소, 재생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들은 글로벌 탄소중립 전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다자 협력의 틀 내에서 기후 기술 이전과 녹색 금융 메커니즘이 활성화된다면, 한국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시장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동시에 개발도상국의 기후 대응 역량 강화에 기여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도 높일 수 있습니다.
결국 다자주의 회복은 단순히 외교적 문제를 넘어서 글로벌 거버넌스(Governance)의 기본 체계를 다시 정립하는 문제입니다. 한국은 중견 국가로서 국제 사회에서 다자외교를 선도할 위치에 있습니다.
다자주의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를 가치 있는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전략과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먼저, 개발 재원 확보와 글로벌 경제 구조 개혁에 적극 참여하여 개발도상국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둘째, 기후 변화와 보건 등 글로벌 공공재 제공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력과 경험을 활용한 실질적 기여를 확대해야 합니다. 셋째, 국제 규범 형성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한국의 이해와 가치를 반영해야 합니다. 현재 국제 질서의 재편 속에서 다자주의는 단순히 선언적 수준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Dr. Alemayehu가 강조했듯이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위기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는 기존의 다자 체제가 갖고 있던 구조적 한계와 불공정성을 직시하고 이를 개혁하는 용기를 요구합니다.
경제적, 기술적, 그리고 외교적 관점에서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고 실행해야만 한국이 이 혼란 속에서 도약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자외교를 통한 한국의 역할은 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단순히 국제적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사회와 경제, 그리고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와 연결되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다자주의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강대국과 중견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며, 글로벌 공공재 제공에 기여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과 국제 사회의 이익을 동시에 증진하는 길입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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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globaltaxjustice.org
climatechangenews.com
centerforglobaldevelopment.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