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협력 체제, 흔들리는 다자주의
최근 국제 사회는 유엔과 같은 다자협력 체제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가운데, 이러한 체제가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자주의(multilateralism)는 전통적으로 국가 간의 협력과 상호 의존을 중시하는 국제 질서를 의미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글로벌 협력 체제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시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국제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경제, 그리고 세계적 문제 해결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최근 Global Tax Justice의 Dr.
Dereje Alemayehu는 'Repairing the Foundations of Democratic Multilateralism and Keeping Alive Financing for Development'라는 글을 통해 다자주의 붕괴의 심각성을 경고했습니다. 그는 유엔 설립 초기 다자주의의 목표가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 충돌을 방지하고 국제적 협력을 조율하는 데 있다고 강조합니다. Alemayehu 박사는 "유엔 창설의 근본 목적은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의 반복을 막는 것이었다"며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국제법이 '정글의 법칙'으로 대체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다자주의의 기반이 손상되었을 때 개별적인 노력은 무의미해지므로, 기반을 수리하고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그는 현재의 국제 질서가 기본 원칙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국가주의적이고 일방적인 접근이 협력 대신 대결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글로벌 재정 시스템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국가 간 신뢰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해결기구는 2019년 12월 이후 기능이 사실상 정지된 상태이며, 이는 다자주의 위기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기후 변화는 다자협력 체제 붕괴의 또 다른 중요한 사례로 꼽힙니다. Climate Home News의 Catherine Bowyer는 'Green shipping talks are a test for multilateralism'에서 국제 해운 부문의 탄소 배출 감소를 위한 다자적 논의가 국가주의적 경향 속에서 시험대에 올랐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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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해운 부문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를 차지하며, 연간 약 10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운산업은 세계 경제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탄소 중립 전략을 이행하기 위한 합의는 오히려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23년 해운 부문의 2050년 탄소 중립 목표를 채택했으나, 구체적 이행 방안을 두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이견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탄소 가격제 도입, 청정 연료 전환 비용 분담, 개도국 지원 규모 등 핵심 쟁점에서 합의가 지연되면서 목표 달성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효율성이 위태롭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같은 수출 주도형 국가들에게 이러한 협력 부재는 특히 심각한 도전 과제를 안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세계 9위의 해운 강국이자, 조선업 분야에서 세계 1위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25년 기준 한국의 선박 발주량은 전 세계의 약 40%를 차지하며, 특히 친환경 선박 수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 해운 부문의 탄소 규제가 다자적 합의 없이 개별 국가나 지역 차원에서 파편화될 경우, 한국 조선·해운 산업은 규제 불확실성과 시장 분열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공중 보건 분야에서도 다자주의의 중요성은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명확히 입증되었습니다. Gunilla Carlsson과 Anders Nordström은 'No One Wins If Multilateralism for Health Loses'에서 글로벌 보건 시스템의 개혁이 지연될 경우 모두가 피해를 볼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팬데믹 초기 백신 민족주의, 의료 물자 수출 제한 등 일방적 조치들이 국제 협력을 저해하며 위기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던 경험은 다자주의 약화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다자주의의 위기 상황 속에서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분야 중 하나는 개발 재원 조달 문제입니다. 유엔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2030년까지 달성하기 위해 연간 약 4조 달러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조달된 재원은 목표치에 크게 미달하며,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많은 개도국들이 부채 위기에 직면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Dr. Dereje Alemayehu는 이에 대해 "개발 재원은 단순히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위한 모금 수단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 및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개발 재원 마련 과정(Financing for Development)이 처음에는 민주적 다자주의의 기능적 시스템을 전제로 했으나, 현재는 그 전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므로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하려 하지 말고 위기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국제 재정 문제와 한국의 참여 가능성
한국은 다자적 재정 논의의 주요 참여국으로서 중요한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여 원조 공여국으로 전환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유일한 사례로, 개발협력 분야에서 한국의 독특한 위치를 보여줍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는 약 38억 달러로, 국민총소득(GNI) 대비 약 0.19% 수준입니다. 이는 OECD DAC 평균인 0.37%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한국은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를 2012년 설립하여 본부를 서울에 두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GGGI는 현재 40여 개국이 회원국으로 참여하는 국제기구로 성장했으며, 개도국의 녹색 성장 전략 수립과 이행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GGGI를 통해 연간 약 5천만 달러 규모의 기후 재원을 개도국에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다자적 기후 협력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하지만 국제 사회와의 협력이 약화될 경우, 이러한 노력이 단절될 우려가 큽니다. 더불어,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국제 무역 체제의 변화에 매우 민감합니다.
한국의 2025년 수출 의존도는 GDP의 약 42%에 달하며,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선박 등 주력 산업이 수출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자주의가 약화되고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된다면, 기업들의 경쟁력은 물론 국내 고용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 해결 기능이 약화될 경우, 중소기업들이 직면할 무역 장벽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WTO 분쟁해결기구의 상소기구는 2019년 12월부터 미국의 위원 임명 거부로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역 분쟁 해결에 평균 2~3년이 소요되던 절차가 무기한 지연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는 규칙 기반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다자주의는 단순히 외교나 경제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방향성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 중 하나입니다.
한국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초기 대응으로 글로벌 협력 모델로 주목받았으나, 만약 공중 보건 시스템이 국제적 협력 없이 작동한다면 잃어버린 신뢰는 불필요한 혼란과 비용을 초래할 것입니다. 한국의 코로나19 대응 성공 사례는 K-방역으로 불리며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진단키트의 신속한 개발과 보급, 투명한 정보 공개, 효율적인 역학조사 등은 WHO를 비롯한 국제기구들로부터 모범 사례로 인정받았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진단키트와 방역 노하우를 100여 개국에 수출하거나 지원하며 글로벌 보건 협력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백신 개발과 초기 확보 과정에서는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코백스(COVAX) 등 다자적 백신 공급 체계 없이는 팬데믹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한국 국민들의 일상에서도 다자주의 붕괴의 여파는 이미 감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주요 국가에서 공급망 위기가 확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021~2022년 글로벌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는 자동차, 가전제품, IT 기기 등 광범위한 산업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다자적 공급망 관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는 반도체와 같이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은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약 60%를 점유하고 있으며, 반도체 산업은 한국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입니다. 국제적인 상품 통로가 차단되거나, 무역 제한이 확대되면 국민들이 접하는 최종 제품의 가격 상승과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21년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 사태 당시 국내 자동차 생산이 일시 중단되거나 감축되면서 소비자들의 차량 인도 대기 시간이 6개월 이상으로 늘어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한국 시장과 사회, 다자주의의 붕괴가 가져올 변화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도 다자주의의 중요성은 명확합니다. 한국은 에너지의 약 9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원유, 천연가스, 석탄 등 주요 에너지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제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으로서 한국은 석유 비축 의무를 이행하고, 에너지 위기 시 공동 대응 체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자주의가 약화되어 에너지 민족주의가 확산될 경우, 에너지 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정으로 한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향후 전망과 시사점
그렇다면 한국은 이 다자주의 위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지속 가능한 협력 모델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지도적 역할을 강화하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특히 한국은 소프트 파워를 활용해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 공중 보건, 디지털 거버넌스 등의 글로벌 현안에서 공통의 목표를 제시하며, 각국의 이해를 조율하는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여러 분야에서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왔습니다.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통한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 2021년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주최 등은 한국이 글로벌 의제 설정과 중재에서 건설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024년에는 제3차 유엔 인도주의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며 글로벌 인도주의 협력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디지털 분야에서도 한국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와 디지털 혁신 역량을 바탕으로, 디지털 거버넌스와 사이버 안보 분야에서 국제 규범 형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025년 서울에서 개최된 사이버 안보 정상회의에서는 국가 간 사이버 공격 규제와 디지털 공간의 신뢰 구축을 위한 서울 선언이 채택되었으며, 한국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Dr. Dereje Alemayehu의 통찰처럼, 국제 질서의 균열은 모든 참여자의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은 글로벌 사회에서의 책임감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자국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위해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더불어, 장기적으로는 자국의 경제 모델을 부가가치 창출 위주로 전환하며, 다자적 협력이 중단되더라도 국내적으로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2023년 발표한 '글로벌 중추국가' 전략을 통해 다자외교 강화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는 자유, 평화, 번영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글로벌 도전 과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고,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이를 위해 ODA를 GNI 대비 0.3%까지 확대하고, 기후 재원 기여를 늘리며, 개발협력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자주의는 단순한 외교 프레임워크가 아닌 우리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한국은 과거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책임 있는 글로벌 시민국가로서 다자주의 회복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다각적인 접근을 지속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독특한 경험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이 중견국으로서 균형 잡힌 시각과 실용적 해법을 제시한다면, 위기에 처한 다자주의를 재건하는 데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지영 기자
[참고자료]
globaltaxjustice.org
climatechangenews.com
centerforglobaldevelopment.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