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나우의 도시가 흔들렸다. 음악으로 흔들렸고, 정치로 흔들렸으며, 끝내 양심으로 흔들렸다. 제70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 2026) 결승 무대에 막이 오른 그날 밤, 오스트리아 비엔나(빈)는 그저 가요제의 도시가 아니었다. 불가리아의 신예 가수 다라(Dara)가 신곡 '방가랑가(Bangaranga)'로 사상 첫 우승컵을 거머쥐는 역사적 순간 뒤에는, 가자 전쟁의 비명과 다섯 나라의 보이콧, 그리고 객석에서 펄럭이던 팔레스타인 깃발의 묵직한 침묵이 함께 흘렀다. 이번 결승의 헤드라인은 단순한 '음악의 승리'가 아니다. 음악이 정치와 윤리를 만나 가장 무거운 합창을 들려준 밤이었다.
음악 축제 70년, 가장 무거운 정치적 무대가 되다
2026년 5월 16일 밤, 오스트리아 빈의 비너 슈타트할레(Wiener Stadthalle) 에서 창설 70주년을 맞이한 유럽 최대 음악 축제의 막이 올랐다. 25개국이 결승 무대를 밟았으나, 무대 바깥의 풍경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부터 겨울 사이, 스페인·슬로베니아·네덜란드·아이슬란드·아일랜드 다섯 나라의 공영방송이 차례로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 하나, 이스라엘의 참가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기습 이후 이어진 가자 지구 군사 작전을 두고, 유럽 방송 연합(EBU)이 이스라엘 출전을 허용한 결정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음악이 국경을 넘는다는 유로비전의 오랜 구호는, 올해만큼은 무거운 윤리적 물음표 앞에 멈춰 서야만 했다.
불가리아의 '방가랑가', 65년 만의 첫 트로피를 들어 올리다
무대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불가리아였다. 본명 다리나 요토바(Darina Yotova) 인 가수 다라가 부른 '방가랑가'는 불가리아 전통 선율과 일렉트로닉 댄스 비트를 절묘하게 엮은 곡으로, 본래 우승 후보 명단에는 좀처럼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심사위원단 204점, 시청자 투표 312점, 합계 516점이라는 압도적 점수가 결과를 갈랐다. 불가리아의 유로비전 우승은 1961년 첫 참가 이후 65년 만에 처음 있는 쾌거다. 한편 '미셸(Michelle)'을 부른 이스라엘 대표 노암 베탄(Noam Bettan)은 심사위원 투표에서 5위에 머물렀으나, 시청자 투표 343점의 힘에 떠밀려 종합 2위에 올랐다. 3위는 296점의 루마니아였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은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2위를 기록한다.
1,000명의 행진, 야유, 그리고 키피야
결승 당일 빈 시내 크리스티안 브로다 광장에는 1,000명이 넘는 친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모여 슈타트할레 방향으로 행진했다. "집단학살을 축하하지 말라", "보이콧 이스라엘", "이 무대에 인종학살은 없다"라는 현수막이 도심을 가로질렀다. 베탄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객석 곳곳에서는 팔레스타인 깃발과 키피야(전통 두건)가 흩날렸고, 이스라엘 시청자 투표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에는 야유 소리가 또렷이 흘러나왔다.
앞서 5월 12일 1차 준결승에서도 관객 네 명이 "집단학살을 멈추라(Stop the genocide)"라고 외치다 경비원에게 퇴장당한 사실이 호스트 방송사 ORF에 의해 확인됐다. 유럽 방송 연합은 이스라엘 공영방송 KAN이 "베탄에게 10표를 모두 던지라"라는 동영상을 게재한 사실에 대해 공식 경고를 발부했고, 해당 영상은 곧 삭제됐다.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아녜스 칼라마르는 SNS에 "집단학살과 불법 점령, 아파르트헤이트가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이 설 무대는 없다"라고 적었다.
트로피보다 무거운 빈 의자, 박수보다 길게 남은 침묵
오스트리아 빈은 본래 알프스 자락에 자리한 평화와 예술의 도시다. 그러나 그날 밤, 빈은 21세기 유럽의 양심이 어떤 무게로 흔들리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대한 거울이 되었다. 우승컵을 안고 흐느낀 다라의 환희, 2위 자리에서 야유를 견뎌야 했던 베탄의 굳은 침묵, 그리고 다섯 나라의 빈 의자가 던지는 무언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음악 한 곡이 결코 정치와 분리될 수 없음을 다시 배운다.
노래는 본디 상처받은 자의 기도이며, 잃은 자의 외침이고, 다시 일어서려는 자의 호흡이다. 가자 지역에서 쓰러져 간 수많은 아이의 이름, 그리고 인질로 끌려간 이스라엘인 가족들이 밤마다 흘리는 눈물 — 그 두 슬픔이 결국 같은 하늘 아래 놓여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빈의 밤이 우리에게 남긴 진짜 메시지는 트로피의 빛깔이 아니다. 평화는 노래보다 길고, 정의는 박수보다 무거우며, 한 생명은 어떤 트로피보다 귀하다는, 오래되었으나 절대 낡지 않은 진실. 그 진실 하나가 비엔나의 밤하늘 아래 조용히, 그러나 또렷이 울려 퍼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