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로 향합니다.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그리했습니다. 시간이 한나절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있었습니다. 우물가에 있는 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여인과 나눈 대화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목마름으로 시작했는데 마지막은 예배할 장소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여인이 예수님께 물은 말이 성전논쟁 아닙니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성전논쟁이 오래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어진 성전논쟁, 그 시작은 언제입니까? 솔로몬이 죽자 통일 이스라엘은 둘로 쪼개집니다. 이는 솔로몬이 신앙을 버린 결과입니다(왕상 11:9). 그나마 하나님은 다윗을 기억하시고 두 지파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렇게 남 유다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한동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두가 예배합니다.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는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이를 근심스레 지켜본 여로보암 1세가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그가 내놓은 신앙정책은 가히 파격적이라 부를만합니다. 오직 하나뿐인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할 새로운 성전도 세웠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워 하나님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여기에 제사장 되기를 원하는 이에게 제사장직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론 계 제사장 제도가 무력화되었습니다. 더구나 절기도 은근슬쩍 마음대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렇게 추수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조율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환호합니다. 놀랍게도 또다시 편의주의 예배가 작동한 셈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예배가 강화되자 백성은 초긴장했습니다. 심지어 예전에는 없었던 절기용 성경까지 확정됩니다. 그런 상황에 가까운 거리인 벧엘과 단에 성전이 생겼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성전은 예루살렘과 차별화되었습니다. 조각된 금송아지가 떡하니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보이는 하나님이 실제가 된 현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에 두 번째로 금송아지가 등장하게 됩니다. 문득 로시아 문호인 톨스토이가 쓴 우화집 제목이 떠오릅니다.
"사탄의 일은 아름답고 하나님의 일은 까다롭다."
북이스라엘 신앙정책에 유다는 어떻게 대응합니까? 솔직히 대응이라기보다는 속수무책이었다고 봄이 맞습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냐고 묻는데 어떻게 답변해야 옳습니까? 더구나 지울 수 없는 야곱의 서원까지 있습니다. 그러니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란 뜻까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절묘한 언어유희에 휘말려 유다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웃지 못할 성전논쟁은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후에도 계속됩니다. 물론 북이스라엘이 아니라 사마리아로 대상이 바뀌긴 했습니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흑해 인근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에 다른 민족을 살게 합니다. 이는 민족 정체성을 빼앗아야 통치가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종족이 이스라엘 땅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살아남고자 혼합종교를 수용합니다. 자기네 고유종교에 북이스라엘 신앙을 덧씌운, 사마리아 종교입니다. 그렇게 겉으로는 유대교와 엇비슷한 신앙체계가 세워집니다. 성전과 관련한 중요 기재는 성경과 제사장입니다. 사마리아 종교에도 사마리아 오경이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오경은 그 역사가 유대교 경전보다 오래입니다. 또한 성전예배를 집행하는 제사장도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스룹바벨 성전건축을 함께하자며 졸랐습니다(에 4:2). 하지만 스룹바벨 총독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때부터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그런 연유로 스룹바벨 성전은 건축이 지지부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전논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격화됩니다. 바빌론 포로기를 통과하며 유대교가 등장합니다. 아울러 예루살렘 성전, 그 정당성을 변증하게 됩니다. 돌아보면 바빌론에서 시작된 회당에서 연마한 성경연구 결과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논쟁에서 오랜 기간 수세에 내몰렸습니다. 그랬던 예루살렘이 유대교 등장과 함께 각성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 연구가 깊이를 더하며 놓쳤던 주제를 찾아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그러니 2차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찾아낸 명제가 새삼스럽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사마리아는 여전히 벧엘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예루살렘을 대변합니까? 무엇보다 벧엘에 담긴 역사성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야곱을 뛰어넘을 또 다른 약속이 없는 한 불감당입니다. 하지만 에스라 학파는 기어이 그 명제를 찾아냅니다. 그렇게 벧엘을 뛰어넘는 역사성과 명제를 제시합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전임을 밝힙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 오직 하나인 성전임을 어떻게 증명했습니까?
예배와 연관된 모두가 창세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에는 특히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지시한 땅이 두 곳 나옵니다. 벧엘은 그중 한 곳입니다(창 35:1). 그러면 나머지 한 곳은 어디입니까? 놀랍게도 그 한 곳이 모리아 산입니다(창 22:2). 아브라함이 백 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곳입니다. 이삭은 보통 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며 제대로 할례받은 첫 사람입니다(창 21:4). 성전은 모든 언약과 뒤엉켜있습니다. 그러니 할례 언약 역시 소중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모리아 산은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한 곳입니다. 더구나 그 사건 이후 "여호와이레"가 신앙 언어로 등장합니다.
성막과 성전을 통틀어 이만큼 중요한 예배 언어가 있습니까? 여호와이레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도 관련됩니다. 이 중요한 신학 명제를 어떻게 이제야 찾아냈습니까? 그러니 바빌론 포로기에 성경을 얼마나 깊이 성찰했는지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인가를 검증해야 합니다.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이라면 확실히 벧엘 역사성을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만약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이 아니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인지 역대기가 기록한 예루살렘 성전 터가 새삼스럽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 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역대기는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중 하나입니다. 그 역대기를 기록한 이가 누구입니까? 바빌론 포로기를 통과하며 학파를 일으켜 세운 에스라로 봅니다. 그는 율례 학자이자 학자이며 제사장이었습니다(에 7:11). 에스라 때부터 유대교가 시작되었다고 봄이 정설입니다. 유대교가 등장하며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에 담긴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이 지닌 신학 의미도 다시 성찰합니다. 그렇게 성전이 담아낸 신앙 명제가 여호와이레임을 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곧 사람과 장소를 통해 드러납니다.
에스라 학파가 찾아낸 예루살렘 성전에 담긴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모리아 산 위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세워졌습니다. 절묘하게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다윗이 얽혀있습니다. 믿음과 구원과 은혜라는 예배 삼박자가 맛깔나게 어우러집니다. 모리아 산이 간직한 여호와이레는 가장 중요한 예배 본질입니다. 알고 보면 벧엘도 여호와이레 연장선에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벧엘은 야곱이 서원했던 모호함이 남아있습니다(창 28:20-22). 그러니 아무리 벧엘이 중요해도 모리아 산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여호와이레에 타작마당과 맞물린 은혜도 있습니다. 다윗이 죄를 토설하자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죄 많은 자에게 은혜가 넘치니 성전으로는 제격입니다.
역대기가 예루살렘 성전이 모리아 산임을 입증합니다. 그러자 성전논쟁 분위기가 급격하게 뒤바뀝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만이 모세가 예언한 장소임을 밝힙니다(신 12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