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육종 권위자’ 고희종 명예교수, 종자주권 수호 위해 다시 전면에 서다
대한민국 농업생명과학의 기틀을 닦고 평생을 식물 분자육종 연구와 후학 양성에 헌신해 온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고희종 명예교수가 최근 한국 종자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구조적 이정표를 제시하며 학계와 산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고 교수는 과거 서울대 내에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 역량을 자랑하던 식물분자육종사업단을 이끌며 국내 육종기술을 글로벌 무대로 끌어올린 석학이다. 비록 해당 사업단의 사업기간이 끝남에 따라 국가 예산 지원 종료됨으로써, ‘연구 연속성의 결여’를 직접 마주하기도 했으나, 현장을 향한 그의 학술적 열정과 비판적 문제의식은 정년퇴임 이후에도 여전히 날카롭다.
그는 현재 사단법인 한국종자연구회 제11대 회장으로서 대한민국 종자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현장 중심의 행보를 본격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특히 최근 대전에서 열린 한국종자협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 주제 발표와 종자연구회 심포지엄을 통해 국내 종자 산업이 직면한 적나라한 현실을 통계로 짚어내며 국가적 차원의 대대적인 구조 개편을 촉구했다.
고 교수는 “우리가 세계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지금처럼 영세한 구조와 관행에 안주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는 우리 식탁에 오르는 모든 농산물의 주권을 해외 기업에 통째로 저당 잡히는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세계는 ‘AI·바이오’로 폭발적 성장, 한국은 ‘1%의 벽’에 정체
한국종자연구회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종자 시장은 인공지능(AI)과 첨단 바이오 기술과의 융복합을 통해 가파른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글로벌 종자 시장은 2023년 663억 달러 규모에서 오는 2033년 1,128억 달러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 가운데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GM(유전자변형) 종자가 점유하며 시장을 강력하게 주도하고 있으며, 글로벌 상위 3개 기업이 전체 시장의 47%를 장악하는 등 대기업 중심의 과점화 체제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 종자 산업의 현주소는 초라하다. 국내 시장 규모는 수출을 모두 포함해도 약 6,901억 원(2024년 기준) 수준으로, 거대한 세계 시장의 단 1%의 벽에 갇혀 정체되어 있다. 글로벌 무대에서의 규모 경쟁은 물론이고 기초적인 질적 경쟁력에서조차 명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글로벌 선도 기업들이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디지털 육종’ 생태계를 선점하며 품종 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사이, 국내 시장은 고부가가치 종자 개발을 위한 원천 기술 확보조차 지연되고 있다. 여기에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내재해성 유전자원 발굴마저 저조해 향후 세계적인 종자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이 완전히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결국 글로벌 시장과의 격차는 단순한 매출 규모의 차이를 넘어, 미래 농업 생태계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근본적인 생존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등록 기업 2,365 개 돌파했으나 89.4%가 매출 5억 미만 ‘착시효과’
고 교수는 이러한 내수 위기와 정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국내 종자 기업들의 극단적인 영세성과 연구개발(R&D) 역량의 취약성을 지적한다. 국내 등록 기업 수는 2015년 1,078개에서 2024년 2,365개로 외형상 크게 늘어났으나, 이 중 매출 5억 원 미만의 영세기업이 무려 89.4%를 차지하는 비정상적인 구조다.
자체 육종기능이 있는 기업은 단 9.1%에 불과해 독자적인 신품종 개발 능력이 매우 낮은 실정이며, 대다수 중소기업의 연간 R&D 투자액은 고작 수천만 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통상 신품종 하나를 개발해 상용화하기까지 최소 7년에서 10년 이상의 장기적인 연구와 수억 원 단위의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국내 기업들의 투자 규모는 기초적인 유지 관리에 불과해 사실상 ‘미래 성장 동력의 포기’와 다름없다는 분석이다.
특히 현대 육종은 과거의 전통적인 선발 방식을 넘어 유전체 빅데이터 분석과 분자표지 활용 등 고도의 첨단 바이오 기술력을 요구하는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자체 연구 인력과 인프라가 전무한 국내 영세 기업들은 이러한 세계적 기술 트렌드에 발맞추기는커녕, 기존 품종의 단순 증식이나 개량 수준에 그치고 있어 글로벌 기업과의 기술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고 교수는 “이러한 영세한 재정 구조 속에서는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이 소요되는 분자 육종이나 유전체 분석 등 고도화된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이는 필연적으로 전문 인력 양성 체계의 붕괴와 국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고 강하게 경고했다. 실제로 국내 종자 수출량은 2021년 626.2톤에서 2024년 433.3톤으로 급감했다. 반면 양파·고추·토마토 등 주요 품목의 해외 의존도가 심화되면서 연간 2,200만 달러 규모의 순수입 구조가 고착화되어 국가 식량 주권마저 위협받고 있다.
◇규제 장벽에 막힌 ‘유전자 가위’... 순환 보직이 키운 관료 사회의 한계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후 변화와 식량 안보 위기가 심화되는 현시점에서 생존을 위한 필수 무기인 GMO 및 유전자 가위(Genome Editing) 작물에 대한 국내의 경직된 태도와 관료 사회의 시스템 오류다.
이미 미국, 유럽, 일본 등 글로벌 농업 선진국들은 유전자 가위 기술을 적용한 첨단 작물들을 차세대 신육종 기술(NBT)로 분류하고 실용화하여 활발히 시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기술적 안전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사회적 거부감과 규제 장벽에 가로막혀 기초 연구조차 현장에서 거부당하는 왜곡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고 교수는 농림축산식품부 등 정책 관할 부처 공무원들의 전문성 결여와 전문 지식의 단절을 유발하는 ‘잦은 순환 보직 제도’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국내 종자 산업의 현실과 왜곡된 규제를 바로잡기 위해 정책 연구 보고서에 구체적인 해결 방안과 로드맵을 상세히 기술해 발표했지만, 정책을 집행해야 할 부처의 실무 공무원들이 자꾸 바뀌다 보니 정책적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현장의 목소리가 중간에서 증발해 버린다”며 국가 정책 시행의 연속성이 무너진 관료 사회의 한계를 안타까워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직속 컨트롤타워’ 신설 등 전방위적 제도 혁신 필요
고희종 교수는 대한민국 종자 산업이 이 고질적인 ‘1%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으로 ▲기업 규모화 ▲첨단 기술 도입 ▲수출 시장 다변화 ▲기업 친화적 법규 정비를 포함한 전방위적 제도 혁신을 제시했다.
특히 파편화된 예산과 정책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현행 종자위원회의 기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거나, 농식품부 직속의 ‘종자산업발전추진위원회(가칭)’를 신설해 정책과 산업을 총괄할 국가적 컨트롤타워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를 통해 중장기 국가 전략을 수립하고 산업계·학계·연구기관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종합 거버넌스를 구축해야만 글로벌 대기업들의 과점 체제에 맞설 최소한의 기초 체력을 갖출 수 있다는 계산이다.
“종자는 단순한 산업의 영역을 넘어 국민의 먹거리와 식량 주권, 그리고 국가 안보와 직결된 최첨단 전략 자산이다. 정부와 학계, 산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기업 규모화와 유전자 가위 등 첨단 기술 도입, 제도 혁신을 동시에 추진해야만 세계 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퇴임 후 과거의 업적 회고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대한민국 종자 산업의 최전선에서 정책 개혁의 도화선이 되고자 하는 그의 신념은 멈추지 않는다. 고 교수의 고언이 위기에 빠진 한국 종자업계를 깨우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진정한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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