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석(주)도 바람이 통해야 실하게 크는 법이다.”
한여름 뜨거운 고추밭에서 외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어린 저보고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을 텐데, 수십 년이 지났어도 햇빛에 삭지 않고 기억나는 게 놀랍습니다.
바람은 작물의 3대 요소, 5대 요소에 포함되지 않으니, 외할아버지의 말씀은 당연히 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외할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차창 밖으로 길가의 나무와 칡덩굴들이 바람에 너울너울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카시나무는 깃발처럼 팔락팔락하는데 참나무의 몸짓은 점잖습니다.
그중 춤을 제일 멋지게 추는 나무는 훤칠한 미루나무입니다.
작은 나뭇잎이 몸을 뒤적이며 파르르 흔들릴 때마다 마치 아침 강가의 윤슬이 반짝이는 듯합니다.
신선이 부채를 부치는 모습처럼 단정하게 흔들리는 미루나무를 보고 있으면 한여름도 가을처럼 아름다운 시간인 것을 깨닫습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들을 보면서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새겨 봅니다.
가장 먼저 ‘숨’이 생각납니다. 바람이 없는 곳은 밀폐된 공간이고, 그곳에서는 숨을 쉴 수 없으니까요.
작물이 아무리 광합성작용을 열심히 해도 숨 쉬지 못하면 성할 리 없습니다.
다음으로 바람이 안 통하는 곳에는 곰팡이가 잘 생기는 이치처럼 바람길이 막히게 되면 토질과 작물에 안 좋은 병원균들이 번성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요. 개체로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명 공간이 필요하고, 그 공간 사이로 바람이 스며 다니며 생명을 북돋아 주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상상했습니다.
실제로 연인이나 가족같이 친밀한 사람과의 거리는 45cm 남짓이며, 가까운 친구나 지인과의 거리는 45~120cm 내외라는 연구 결과(주)도 있습니다.
이 최소한의 거리가 깨지면 친밀한 관계도 손상되기 쉽습니다.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산속에서 나무 위쪽을 올려다보면 나무의 우듬지(주)가 보입니다.
나무와 나무의 우듬지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는 것처럼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도의 경계선처럼 나무마다 자기의 우듬지 경계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우람한 나무라 하더라도 다른 나무의 우듬지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습니다.
아마 수천 년 시간 속에서 터득한 공생의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독자님도 '우듬지', '수관기피'를 검색해보면 신비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사람 사이의 최소거리나 나무의 우듬지를 존재의 ‘생명 공간’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빈 공간이 있어야 나도 살고 상대방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비로소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사람이나 나무처럼 온 생명들은 개체로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명 공간’을 필요로 하고, 이 빈 틈새로 바람이 들고납니다.
하여 바람을 쐬지 못하는 작물들은 고통받게 마련입니다.
그러고 보니 서정주 시인이나 방랑식객 임지호가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던 내밀한 사연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바람은 역마살이나 치기 어린 방황이라기보다는 자기만의 ‘생명 공간’을 향한 간섭과 억압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말씀은 수십 년을 뛰어넘어 이제 내게로 향합니다.
“너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그들의 ‘생명 공간’을 성큼 내어주었느냐?
너는 부부로서 배우자의 우듬지를 존중하고 혹여 넘지 않으려 조심하였느냐?
너는 바람과 달빛이 흐르도록 너의 빈 공간을 열어두고 있느냐?”
주1) 곡석은 곡식의 강원도 사투리입니다. 유년의 기억 탓인지 지금도‘곡석’하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때가 묻어난 ‘고마운’ 쌀과 콩이 떠오릅니다.
주2) 미국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저서 <<숨겨진 차원>>. 정신의학신문(2023.7.3.)에서 재인용했습니다.
주3) 우듬지는 나무 줄기와 가지 끝부분을 가르키며, 이곳에서 새잎이나 가지가 돋아납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우듬지 사이의 경계는 수관기피(樹冠忌避, 영어: Crown shyness) 현상으로써 각 나무들의 우듬지가 뚜렷한 영역과 경계선 내에서만 성장하는 현상을 일컫습니다.(위키백과에서 일부 인용)
K People Focus 김황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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