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따지는 촌수는 나를 기준으로 한다. 나는 0촌이고 부자지간은 1촌이고 형제지간은 2촌이고, 큰아버지(백부)와 작은 아버지(숙부)는 3촌이고, 백부와 숙부의 자녀들과는 4촌이다. 이런 촌수에 의하면 나와 남이 분명해진다. 나는 무촌이고 부모든 형제든 남은 모두 유촌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 세상은 크게 무촌과 유촌으로 양분되고 따라서 인간 세상은 나와 남이라는 두 그룹으로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나를 기준으로 할 때 나는 무촌이 되지만 남을 기준으로 할 때는 유촌이 된다. 따라는 인간 세상을 크게 확대해 볼 때 나는 나인 동시에 남이 되고, 반대로 남은 남인 동시에 내가 된다. 인간 세상은 그렇게 나와 남이 구분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되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생기는 잘못은 모두 내 탓이 아닌 남 탓이 된다. 인간의 본성을 놓고 볼 때 자기가 자기를 탓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올바로 깨친 진여법계(眞如法界)는 남도 없고 나도 없는 무타무자(無他無自)의 경지이다. 즉, 모든 상대를 초월하여 양변(兩邊)을 완전히 떠난 상태이다. 현실적 인간사회에는 너와 나, 인간과 동식물, 생물과 무생물처럼 어딜 가나 나 아닌 남(상대)이 있다. 그렇게 너와 내가 있는 현상계를 해탈하여 무타무자(無他無自)의 경지에 들어서면 남도 없고 나도 없는 진여법계(眞如法界)에 이른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팔자(八字)니 업(業)이니 하는 것도 나와 남이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는데 팔자(八字)와 업(業)이 있을 리 없다. 팔자와 업은 순전히 나와 남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 짓고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뿐이면 남과 비교되는 내 팔자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사람은 사람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짐승은 짐승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귀신은 귀신대로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이 물을 보는 것과 악어가 물을 보는 것이 전혀 다르듯, 사람도 사람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다름은 어디까지나 나와 남의 생각과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른 것이지 실재하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인과(因果)와 우연(遇緣)과 필연(必緣)에 의해 한시도 쉬지 않고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살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는 나와 너의 생각일 뿐이다. 무타무자(無他無自)의 진여법계(眞如法界)에는 우연도 필연도 없고, 나와 남도 없고, 이것과 저것도 없는데 무엇이 무엇과 만나고 어떻게 생로병사 한단 말인가?
이 세상의 모든 인연도 선악도 나와 남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일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면 내가 곧 선악이 되고, 천사와 사탄이 되고, 아군과 적군이 되는데 그렇게 내가 내 자신을 대립시키고 윽박지르고 욕하면 그 과보는 오롯이 나에게 돌아올 뿐이다. 즉, 나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나 스스로 좋고 싫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 그 인과에 의한 과보는 오롯이 나 스스로 받을 뿐이다.
대자연에는 선악이 없다. 오직 서로 다른 음양이 있을 뿐이다. 밤과 낮은 선과 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과 양일 뿐이다. 하늘과 땅도 선과 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과 양일 뿐이고, 남과 여, 동물과 식물, 온기와 냉기, 원형과 각형, 오른쪽과 왼쪽, 등등도 모두 선과 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과 양일 뿐이다.
지렁이에게는 수챗구멍이 천국이고, 낙지에게는 갯뻘 속이 천국이고, 새에게는 울창한 숲속이 천국이지만 인간에게는 부귀영화와 무병장수가 보장되는 곳이 천국이다. 이렇게 세상의 삼라만상은 저마다 다른 천국을 가지고 있다. 악취가 진동하는 수챗구멍에 사는 지렁이가 인간 세상을 보면 저렇게 소와 돼지와 닭을 마구 잡아먹는 살생자들과 흡혈귀들이 모여 사는 인간 세상은 참으로 지옥 중의 지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위에서 보듯 너와 내가 있으면 보는 자의 입장에 따라서 천국은 지옥이 되고 반대로 지옥은 천국이 된다. 이것이 거짓 없는 대자연의 참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도 없고 나도 없는 무자무타(無他無自)의 경지가 어떤 곳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없으면 여당도 야당도 없고, 적군도 없고 아군도 없고, 용서할 자도 없고 용서받을 자도 없다. “내 눈에 콩깍지,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 세상은 누구나 자기 그릇만큼 채우고 살아가는 제 눈에 안경일 뿐이다.
-손 영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