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청준 동화가 꿈꾸는 미래 - 별을 기르는 아이, 사랑을 쌓는 사회
창문을 닦는 아이, 세상을 닦는 마음
세상이 차가워질수록 아이들의 눈망울은 더욱 맑아진다. 『별을 기르는 아이』의 주인공 순희는 병든 어머니를 바라보며 창문을 닦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창문 너머로 의사 선생님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별은 엄마의 별이고, 별을 본 의사 선생님이 엄마의 아픔을 알아차려 와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순희의 행동은 ‘비효율’이고 ‘비합리’다. 창문을 닦는다고 별이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당장의 도움이 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동화의 핵심은 가능성이 아니라 ‘행위’에 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감정, 그 자체가 아이에게는 전부다. 그리고 그 순수한 행위는 결국 의사의 마음도 움직인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 의사는 발자국을 따라가 순희를 찾아가게 된다.
이 장면은 묻는다. 사랑이란 말이 아니라 행동이고,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가?
‘보이지 않는 연대’가 만들어낸 기적
순희는 의사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지 않았다. 도움을 청한 적도 없다. 하지만 마음은 닿았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연대, 감정의 통로였다.
오늘날 사회는 효율과 성과, 정보와 전략에 묶여 ‘마음의 신호’를 잃어버리고 있다. 이청준은 동화를 통해 사라져가는 연결의 언어를 되살린다. 순희의 창문 닦기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사랑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감정의 능력이다.
이 동화는 말한다. 누군가가 나를 보지 않아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닿을 수 있다고. 그것이야말로 공동체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자, 이청준이 꿈꾼 미래의 가능성이다.
환상, 현실을 깨우는 무기
『별을 기르는 아이』는 분명 판타지다. 별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고, 창문을 닦으며 기적을 기다리는 일은 현실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화가 주는 힘은 바로 그 비현실성에서 시작된다.
환상은 때로 현실을 깨우는 무기가 된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야만 보이는 감정이 있고, 설명되지 않아야만 움트는 마음이 있다. 이청준은 동화라는 장르에 판타지를 덧입혀, 우리가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감정을 다시 불러낸다.
그의 판타지는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도발이다. 세상이 계산과 성과로만 굴러간다고 믿는 어른들에게, 별을 기르는 아이는 묻는다.
“그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습니까?”
다시 공동체를 말할 때
이청준의 동화는 공동체의 복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제도나 거창한 시스템이 아니다. ‘한 아이의 작은 기도’, ‘창문을 닦는 마음’, ‘눈밭 위의 발자국’ 같은 아주 작고 느린 것들에서 시작된다.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속도도, 기술도 아니다. 바로 감정의 회로다. 공동체란 결국 ‘누군가를 향해 가는 마음의 방향’에서 출발한다.
『별을 기르는 아이』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우리는 여전히, 감정이 닿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첫걸음은 눈 덮인 날, 조용히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