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설가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이 1936년에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39년에 상영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공연시간이 무려 3시간 42분이나 되는 장편의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영화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어 상영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가 마지막 장면에서 외친 “Tomorrow is another day(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다)”라는 한 마디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작품을 번역했던 당시의 저명한 영문학자 장왕록(張旺祿) 교수는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의 외침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작품이 던지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Tomorrow is another day(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모르긴 하지만 이렇게 의역하기까지는 “원문을 살리느냐, 뜻을 살리느냐”를 놓고 정말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뜻을 살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라는 번역을 더 좋아할 것 같다. 희망과 감동을 극적으로 전하는 한 마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마다 언어가 서로 다른 만큼 언어가 주는 감정과 감동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다”라는 독백에서 우리는 별다른 감정과 감동을 느낄 것 같지 않다. 너무 밋밋한 독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는 독백은 뭔지 모르게 우리의 감정과 감동을 가슴속 깊이 자극하는 독백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언어가 가지는 민족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Tomorrow is another day(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다)”라는 원문은 미국적인 감정을 진하게 표현한 말일지는 몰라도 한국인의 감정을 진하게 표현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번역자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렇게 민족의 언어마다 느끼는 정서와 감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의 번역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성경의 영어 원문을 보면 “신(神, God)”라는 단어는 있어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3절에는 “God said, There is light, and there is light.(신이 말하기를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 “God said”를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누구라도 “신이 말하기를”이라고 번역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르시되”로 번역되어 있다.
모르긴 하지만 이런 의역을 하기까지는 장왕록(張旺祿) 교수가 “Tomorrow is another day”를 원문대로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로 의역하기까지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을 것처럼 성경의 번역자 역시 많은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을 것이다. “God said,”를 원문 그대로 “신(神)이 말하기를”이라고 번역할 경우 천신(天神), 지신(地神), 선신(善神), 악신(惡神), 무신(巫神), 등 수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인식될 수 있으므로 아무런 특별한 감정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최초 번역자는 어떤 단어로 번역해야 그 수많은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고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이미지를 담아낼 수 있을까를 수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번역의 원칙은 원문의 뜻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지만 원문이 가진 심적인 정서와 감동을 전하는 것은 또 다른 번역의 원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마음을 비우고 솔직히 한번 생각해 보자. “God said,”를 “신(神)이 말하기를”이라고 번역했을 경우와 “하나님이 이르시되”라고 번역했을 경우 느끼는 감정은 분명 하늘과 땅만큼 다를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문장은 하나뿐인 유일한 신의 말씀이라는 뜻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원문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라고 의역했던 것처럼 “God said, There is light, and there is light.(신이 말하기를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원문대로 번역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르시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번역한 것은 정말 멋진 번역이었고 따라서 포교(布敎)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와 소설은 다르다. 소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이집 저집 맛집을 찾아다니는 자유인들을 전제로 하지만 종교는 한번 빠지면 똥개 목에 채워진 목줄처럼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심리적, 정신적 노예가 되는 목줄이다. 그런 목줄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채우는 데 일조한다면 그것은 잘한 일이 아니라 잘못한 일, 아니 사악한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God said, There is light, and there is light.(신이 말하기를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원문대로 번역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르시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의역한 자(마테오 리치, Matteo Ricci로 추정)는 번역한 동기가 참으로 불순하고 사악한 자인지도 모른다. 동양인들에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정신적 노예의 목줄을 최대한 많이 채우고자 고민하면서 의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 영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