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퇴사가 아닌 '잔류'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유
"왜 아직 거기 있어?"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질문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불쾌한 간섭일 수 있다. 요즘 시대에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 혹은 같은 조직에 머무는 선택은 오히려 ‘용기 있는 예외’처럼 여겨진다. 이직은 커리어 성장의 필수 경로처럼 여겨지고, 퇴사는 인생 리셋의 기회로 각광받는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도 묵묵히 ‘남아 있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잔류는 무기력이 아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맥락 속에서 상황을 유지하는 전략적 결정일 수 있다. 아이의 돌봄 문제, 지역적인 제약, 회사 내에서의 관계 자산, 심지어 조직에 대한 애정이나 사명감까지. 사람마다 회사에 남는 이유는 다양하며, 그 이유는 결코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잔류'는 때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폄하된다. 하지만 묻고 싶다. 정말 그럴까? 회사에 남아 버티는 삶은 더는 퇴색한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 안에서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덕분에 회사는 지속될 수 있다.
2. 이직 신화와 조직 충성 사이의 균열
2020년대 들어 '이직은 능력자의 상징'이라는 담론이 확산됐다. SNS에서는 누구나 “연봉 2천 올리고 퇴사했습니다”, “스타트업 CTO 갔습니다” 등의 문장을 올린다. 퇴사는 당당한 선언이자 커리어의 의식처럼 기능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마치 ‘루저’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런 흐름은 '회사를 떠나는 것'이 곧 ‘자기계발’이 되는 착시를 만들어낸다. 물론 많은 경우 이직은 더 나은 조건과 환경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다. 하지만 ‘무조건 떠나야만 살아남는 것’이라는 논리는 과장된 신화에 가깝다. 이직이 능력의 증명이 되면서도 동시에 탈진의 결과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직 충성이라는 단어는 시대에 뒤처진 언어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꼭 과거식 도그마는 아니다. 동료와의 신뢰, 익숙한 문화, 업무의 깊이 있는 이해는 잔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들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리셋하는 데 드는 비용도 결코 작지 않다. 우리는 한 사람의 선택이 ‘잔류’일 경우에도 그 의미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3. ‘남아 있음’의 전략: 무기력 아닌 기회
‘남아 있음’이 언제나 수동적이라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회사 내부에서의 생존 전략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일 수 있다. 승진의 타이밍을 노리거나, 장기적으로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거나, 조직 내 중요한 역할을 확보하려는 선택일 수도 있다.
특히 30~40대 중간 관리자들은 전환점에 놓여 있다. 이직을 고려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혹은 팀원들이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자리를 지키며 조직의 무게중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조직에 오래 남은 사람은 일의 맥락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그러한 사람들은 변화기에서 더욱 가치 있다.
‘잔류’는 생각보다 많은 역량을 요구한다. 외부의 유혹, 비교, 좌절감을 이겨내야 하고, 자기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 결정을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이 아닌, 자긍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 이는 조직문화의 건강성과도 맞닿아 있다.
4. 결국 중요한 건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떻게 있느냐'이다
결국 우리는 회사에 남느냐, 떠나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어떻게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남는다는 결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조직 안에서의 성장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변화는 꼭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환경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태도와 방향성이다.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기 서사’를 가지고 떠난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사람도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왜 여기에 남았는가?”, “여기서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질 때, 그 잔류는 수동이 아니라 주체가 된다.
"모두가 떠날 때, 남는 것도 용기다."
이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 안에 담긴 전략과 의미도, 제대로 조명받아야 한다. 퇴사만이 해답이 아니라면, 잔류 역시 하나의 당당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