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단 이후의 첫 물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자폐 스펙트럼(Autistic Spectrum Disorder, ASD)을 진단받은 성인에게는 한층 더 무겁게 다가온다. 특히, 어린 시절 진단을 받지 못하고 성인이 된 후에야 비로소 자폐 스펙트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정체성의 근간을 다시 짜야 한다. 한평생 ‘왜 나는 다른가’라는 내적 갈등을 안고 살아온 이들이 이제야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많은 이들은 혼란을 겪는다. 자신이 평생 따라야 했던 사회적 규범과 타인의 기대가, 실은 스스로에게 너무 큰 짐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오랜 시간 억눌렀던 자아가 튀어나오고, 그동안 ‘정상’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각과 감정을 눌러왔는지 깨닫는다. 진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정, 곧 자아를 찾아가는 탐험이 그제야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놀이다. 우리는 놀이를 흔히 어린아이의 전유물로 생각하지만, 심리학에서는 놀이야말로 인간의 본성과 접촉하고 자아를 실험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이라 말한다. 특히 자폐 성인에게 놀이는 억눌린 감정과 사고를 표현하고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다.
놀이는 유년기만의 특권이 아니다: 성인에게도 필요한 놀이심리의 회복
놀이를 ‘아이들만의 것’으로 한정짓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심리적 도구를 잃는다. 특히 성인 자폐인에게 놀이는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자기 탐색의 기제이며, 감정 조절과 자율성 회복의 매개체이다. 이들에게 놀이란 감각의 자유, 관계의 실험, 그리고 억압된 자아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장이다. 성인 자폐인의 놀이에는 일정한 반복이 동반되거나, 강한 주제 집착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이상 행동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접속하려는 시도다. 예컨대, 레고를 조립하거나 캐릭터 인형과 상호작용하는 놀이, 특정 음악을 반복 재생하는 행위는 감각 자극에 대한 조절과 정서적 안정감을 도모하는 ‘안전지대’가 된다. 심리치료 현장에서는 이러한 ‘놀이’를 비의도적·비판단적 환경 안에서 관찰하고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자아 회복을 돕는다. 성인 놀이치료는 구조화된 테라피뿐 아니라, 즉흥연극, 예술작업, 감각놀이 등을 통해 자폐인의 내면을 드러나게 한다. 그 속에서 억눌렸던 감정이 터지고,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아정체성과 놀이: 자폐 성인의 발달을 다시 보다
기존 심리발달 이론은 유아기~청소년기에 집중된다. 그러나 자폐 스펙트럼 성인의 삶은 이 공식을 거부한다. 감정 발달, 자아정체성 형성, 관계 발달이 성인기에도 활발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자폐인의 발달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놀이는 또다시 중심에 선다. 놀이심리는 단지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놀이 속에서 사람은 ‘역할’을 해보고, 다양한 ‘자아’를 실험해 본다. 자폐 성인의 경우, 이러한 놀이적 시도를 통해 오랜 시간 억압돼 온 사회적 자아나 감정적 자아를 회복할 기회를 갖는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서는 성인 자폐인들이 미술, 연극, 스토리텔링, 동물상징 집단놀이 등의 놀이 기반 활동에서 눈에 띄는 정서 발달을 보였다고 보고한다. 이는 놀이가 언어적 제한을 넘어서 감정의 표현을 유도하고, 그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돕기 때문이다.
치유를 위한 놀이, 놀이를 통한 확장된 자아
놀이를 통해 우리는 정해진 틀을 벗어나 자아를 새롭게 구성한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성인에게 이 경험은 곧 ‘확장된 자아’의 발견이다. 자기 존재를 규정짓던 낙인과 억압에서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을 기반으로 한 자아 재구성이 가능해지는 순간이다. 자폐 성인의 놀이가 곧 치료이며, 성장이다. 특히 자유 놀이가 허용되는 공동체나 치료 환경에서는 참여자의 심리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며, 타인과의 연결성도 확장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요.” “이건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에요.”와 같은 반응은 자폐 성인이 놀이를 통해 자아에 도달하고 있다는 증거다. 놀이를 무시하는 사회는 자폐인뿐 아니라 모든 성인의 정서 회복을 막는다. 놀이는 감정 표현과 관계 형성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자폐 성인이 단순히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놀이를 통해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이를 타인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폐 성인의 놀이를 진지하게 바라보자
놀이란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이며 자아의 언어다. 특히 자폐 성인에게 있어 놀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복구하고,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자폐 성인의 놀이는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우리는 그들의 놀이를 존중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놀이를 통해 다시 자아를 정립할 기회를 주고 있는가? 놀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자폐 성인의 자아찾기 여정은 놀이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놀이를 치료가 아닌 ‘존중의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진짜 자아와 연결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시도해보십시오!
성인 자폐인을 위한 놀이 기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나 커뮤니티를 찾아보세요. 혹은 인근 심리상담소 또는 해오름한방병원 심리발달센터(해오름한방병원 부설 정신건강발달센터, 032-932-7020)에서 성인 놀이치료 상담을 요청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지금, 누군가의 자아가 놀이 속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