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만 가르치려 드는가?” - 어른이 먼저 배워야 할 인권 감수성
“어른이니까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 말은 한 초등학교 교사가 수업 중 아이가 던진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때의 고백이다.
우리는 흔히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인권의 감수성도 갖춰질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어른이 차별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그 아픔을 지나치기 일쑤다.
최근 문학계에서 화제를 모은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은 외국인 노동자 자녀의 삶을 그리며, 아이들의 눈으로 사회의 차별과 편견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아이들이 ‘문제의 본질’을 먼저 이해하고 스스로 화해와 존중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작 어른은 그 뒤에 있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사회에 울림을 주는 이유는, 어른이 그 역할을 놓치고 있다는 반증이다.
“존중은 선택이 아니라 훈련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존중은 단순한 매너가 아니다. 그것은 반복적 실천을 통해 체화되는 감각이며, 훈련이다.
공적 공간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 익숙한 시선, 배제의 구조 속에 우리가 자란 방식이 담겨 있다. 문제는 그것을 ‘당연한 문화’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르지 않는’ 일상에서부터 차별을 체감한다. 이들을 위해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은 어쩌면 우리 어른들이 훈련을 놓쳤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존중은 ‘배려’의 이름으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감수성은 본능이 아닌 기술이다”
많은 이들이 감수성을 타고나는 성격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인권 감수성은 관찰력, 언어, 반응, 실천이라는 구체적 기술의 집합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빠르게 인지하고, 그에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고치는 구조를 학습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좋은 마음’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특정 국적이나 외모를 가진 사람을 향해 ‘그래도 착해 보이네’라는 표현을 쓴다면, 이는 의도와 상관없이 편견이 깃든 발언일 수 있다. 감수성은 착함보다 똑똑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점점 다양한 얼굴과 언어를 품게 될 것이다. 그 다양성을 ‘무례하지 않게’ 대하는 기술이 없다면, 공존은 낭만에 그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 어른의 몫을 시작할 때”
지금까지 우리는 아이들에게 인권 교육을 하며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착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어른 대상의 인권 감수성 훈련’이다.
교사, 공무원, 병원 종사자, 기업 관리자, 미디어 종사자 등 사회의 주요 결정 구조에 있는 사람들부터 훈련을 받아야 한다.
최근 유럽 여러 국가에서는 ‘감수성 리터러시’를 공식 교육 과정에 포함시키고 있다. 스웨덴은 초등학교 교사 자격요건에 ‘인권 감수성 훈련 인증’을 요구하며, 독일은 기업 내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프로그램을 의무화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아이들의 문제 해결 능력에 감동만 할 것이 아니라, 어른도 배워야 한다.
감수성을 배우는 사회로 가야 할 때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은 단지 청소년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어른이 빠뜨린 인권 감수성의 부재를 아이들이 메꾸고 있다는 현실의 증언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상 속의 말과 구조들이 누군가에게는 정체성의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서 변화는 시작된다.
다문화, 다양성, 다언어 시대를 맞이한 대한민국에서, ‘배려’의 수준을 넘어서 ‘훈련된 존중’을 실현해야 한다.
감수성은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 기술이며, 이제는 어른이 먼저 훈련되어야 할 몫이다.
늦었다고 주저하지 말자. 아이들은 이미 그 문을 먼저 두드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