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 거리: 초월과 내재
이스탄불의 오래된 전통시장, 카팔르 차르스의 좁은 골목을 걸을 때면 먼지와 향신료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오랜 친구 무스타파와 나누었던 차 한 잔의 시간이 떠오른다. 그는 꾸란을 인용하며, 세상의 창조주이자 전능 전지하시며, 지극히 자비로우신 단일한 신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알라였다. 사실 이 단어는 본래 아랍어권 기독교인들이 수 세기 동안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해 온 이름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 기독교와 이슬람은 같은 뿌리, 곧 유일신 사상에서 출발한 듯 보인다. 창조와 전능, 심판과 전지와 같은 거룩한 속성을 공유하며 인류의 역사를 함께 호흡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름 아래에서 뛰는 두 개의 심장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는 신의 거리를 느끼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이슬람은 타우히드, 곧 신의 절대적 유일성을 강조한다. 그 결과 알라는 인간과 질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된다. 인간은 그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압드, 즉 종일 뿐이다. 주인과 종의 수직적 관계가 전부이기에, 알라와 인간 사이에는 다정한 친밀함이 개입할 자리가 없다. 반면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하시는 분이다. 그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이시지만, 동시에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인격적 아버지이다. 멀리서만 존경해야 하는 권위적 회장님과 매일 식탁에서 삶을 함께 나누는 아버지의 차이는, 곧 두 신을 향한 관계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
사랑의 본질과 삼위일체의 신비
이 차이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서도 선명하다. 기독교 신앙의 심장은 삼위일체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창세 전부터 완전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계셨다. 하나님은 사랑을 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곧 사랑 자체이시다. 그러나 이슬람의 알라는 절대적으로 단일한 존재이기에 창조 이전에는 사랑을 나눌 대상이 없다. 그에게 사랑은 본질이 아니라 단지 속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차이는 성육신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 자체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하지만 무슬림들에게 이것은 신의 위엄을 훼손하는 모독, 곧 쉬르크로 여겨진다.
구원의 길: 법과 은혜의 대비
신의 이해 방식의 차이는 곧 구원의 길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알라를 믿는 이들에게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달려 있다. 그들은 선행과 악행이 최후의 심판 날에 저울에 달리는 것을 믿고, 평생을 노력하지만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절벽을 스스로의 힘으로 기어오르는 것과 같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매달려 살아가야 한다. 반대로 성경의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은혜의 길을 열어주셨다. 구원은 우리가 노력으로 쟁취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선교지에서 만난 한 무슬림 이웃은 임종 직전 이렇게 속삭였다. “내 선행이 알라의 저울 위에서 충분할지, 나는 여전히 두렵다네.” 그 정직한 고백은 율법의 길이 가진 실존적 한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증언이었다.
결국 하나님과 알라의 문제는 단순히 이름의 유사성이나 몇몇 속성의 공유에 머물지 않는다.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알라는 멀리서 군림하는 주권자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이다. 기독교 신앙은 더 나은 종교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참 하나님을 전한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남는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두려움 속에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가. 만약 이슬람의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으려면,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고 사흘 만에 부활시킨 신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꾸란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이름은 비슷할지라도, 그 심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뛴다.
(글: 김종일, 아신대 중동연구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