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은 단순한 관광 명소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 정체성과 역사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나폴레옹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지만, 세월이 흐르며 ‘승리의 문’에서 ‘기억의 문’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혁명, 전쟁, 자유, 그리고 국민 통합의 메시지를 품은 개선문은 지금도 파리의 심장에서 묵묵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샹젤리제 대로의 끝, 파리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개선문은 누구나 한 번쯤 사진으로 본 상징적 건축물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석조문은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프랑스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국민의 집단적 기억이 켜켜이 새겨진 하나의 ‘기념비적 서사’다.
나폴레옹 1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06년 이 문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제국이 몰락하면서 완공까지는 무려 30년이 걸렸다. 완공 당시 프랑스는 이미 왕정복고를 거쳐 또다시 혁명과 공화정을 경험한 후였다. 개선문은 그렇게 한 시대의 야망에서 다른 시대의 희생으로 전이된 상징물로 남았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던 시기의 ‘국가적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그는 “프랑스군이 개선문 아래를 지나가게 하라”는 말을 남기며 제국의 영광을 기념하려 했다.
당시 설계는 고대 로마의 개선문에서 영감을 받았고, 프랑스의 근대적 자부심을 담아 웅장하게 재해석되었다. 높이 50m, 폭 45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석조 구조물은 단순히 건축적 장엄함을 넘어, “승리의 문”으로서 국민에게 제국의 위엄을 각인시키려는 정치적 상징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완공될 즈음에는 나폴레옹 제국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이로써 개선문은 ‘승리’의 기념비에서 ‘역사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변했다. 한 지도자의 야망은 사라졌지만, 그가 세운 문은 이후 세대가 자유와 희생을 기억하는 장소로 새롭게 재해석되었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당시 정부는 전쟁에서 희생된 무명의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개선문 아래에 ‘무명용사의 묘’를 조성했다.
이곳에는 한 병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영원한 불꽃(La flamme éternelle)”이 타오르고 있다. 매일 저녁 6시 30분, 참전용사들이 모여 불꽃을 다시 밝히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 의식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국가의 기억을 매일 되살리는 행위로서 의미가 깊다. 개선문은 이로써 ‘군주의 영광을 기리는 문’에서 ‘국민의 희생을 기억하는 문’으로 의미가 전환되었다. 프랑스 시민들에게 이 불꽃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애국의 상징’이자, ‘민주주의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영혼의 불꽃’으로 인식되고 있다.
개선문은 프랑스의 역사적 변동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나치 독일의 점령군이 개선문 아래를 행진하며 ‘정복의 문’으로 사용했고, 1944년 프랑스가 해방되자 드골 장군은 같은 길을 행진하며 ‘자유의 문’으로 되살렸다.
이처럼 개선문은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받으며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재정의해 왔다. 현대의 파리 시민들에게 개선문은 단순한 기념비가 아닌, “프랑스 정신의 축약된 상징”이다.
그 아래를 지나는 수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은 과거의 승리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의 희생’을 더 크게 기억한다. 개선문은 그렇게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한다. “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기억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
파리 개선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 국민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 돌기둥에는 단순히 군사적 승리만이 아니라, 희생, 자유, 그리고 평화에 대한 국민의 염원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에 이 문은 ‘과거의 유산’' 아니라 ‘현재의 교훈’으로 존재한다. 개선문은 프랑스가 어떤 나라였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상징적 거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