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의 디도서 3장 강해를 바탕으로, 권위의 본질과 공적 순종, ‘죄와 은혜’의 복음, 그리고 선한 일의 학습과 실천을 유기적으로 해설합니다. 오늘의 사회에서 온유와 공공선을 세우는 목회적·신학적 지침을 제시합니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의
디도서 3장 강해는 바울의 목회적 심장부를 꿰뚫어 읽어 내리듯, 교회
내부의 질서에서 사회적 책임으로, 다시 구원의 비밀인 ‘죄와
은혜’로 나아가는 유기적 전개를 정밀하게 따라간다. 핵심
축은 디도서 2장 14절과
15절, 그리고 3장 전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선언은 구원의 목적을 명료하게 못 박고, 이어지는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라”는 명령은 그
목적을 현실의 목회 현장에 밀착시키는 촉매로 작동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권위가 직분의 외피에서 나오지 않고, 목회자가 먼저 말씀을
살아내는 실천성에서 나오는 영적 권위라고 해석한다. 바울의 표현을 원문까지 더듬어 가면 “모든 권위”(μετὰ πάσης ἐπιταγῆς)는 권위적 태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복음 자체의 신적 권위를 내 삶으로 입증해 낸 사람에게 자연스레 부여되는 무게감이다. 그래서 ‘말함’은 교리의
명료한 가르침이고, ‘권면’은 낙심한 자를 붙드는 인격적
곁붙임이며, ‘책망’은 무너진 것을 세우는 외과적 처치다. 이 삼중의 사역이 성도들의 삶을 ‘바른 교훈(ὑγιαινούσῃ
διδασκαλίᾳ)’으로 재조정해 교회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통찰은, 장재형목사가 설교
전반에서 유지하는 결을 보여 준다.
그 결은 3장으로 건너가면 곧장 사회적 삶의 현장에 접속한다.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을 예비하게 하라”는 3장 1절은 하늘 시민권과 땅의 시민권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지도처럼 제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빌립보서 3장 20절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라는
정체성 선언과 로마서 13장 1–7절의 질서 신학을 함께
읽어 낸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고, 관원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하수인으로 부름 받았기에(“하나님의 사자”),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단순한 처벌 회피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때 양심은 권력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내면의 기준이다. 1디모데 2장 1–2절이 덧붙여 주는 그림도 선명하다. 우리가 임금들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경건과 단정 가운데 고요하고 평안한 삶을 이루기
위함이다. 장재형 목사의 강조점은 여기에 있다. 순종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질서 있는 평화를 도모하는 실천이며, 동시에 사도행전 5장 29절이 증언하듯 하나님의 명령과 정면 충돌할 때에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도덕적 변증법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균형을 잃지 않을 때 그리스도인의 공적 삶은 신앙의 고양된 내면과 사회적 선행이 긴밀히 맞물리며, 납세나
공공선에의 기여, 통치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일상의 습관화로 구체화된다.
디지털 시대의 공론장에서 특히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언어’가
악순환의 분노를 확대 재생산하는 알고리즘에 봉사하지 않도록, 복음적 양심이 언어 윤리를 견인해야 한다는
적용점도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3장 2절은
이러한 공적 윤리의 어휘를 더 세밀하게 벼린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 장재형목사는 예수께서 비유로 하나님의 마음을 그려 내셨다면, 바울은 훈련된 랍비로서 사랑과 온유를 분석적으로 서술해 학습 가능한 성품으로 제시했다고 본다. 여기서 ‘온유’(πραΰτης)는
무력함이 아니라 ‘힘의 절제’이며, 관계를 파괴하는 언어 폭력과 단호히 결별하는 내적 강인함이다. ‘훼방하지
않음’은 단순한 침묵의 미덕이 아니라, 타자를 정의롭고 자비롭게
해석하려는 신학적 상상력의 습관이다. 온유와 관용은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 목록 속에서 이미 복음적 인격의 표지로 자리해 왔고, 바울은 이 사회적 미덕을 공동체 밖에서도
동일하게 작동시키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바울은 곧장 신학의 심장으로 내려간다. 3장 3절은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치 아니하고 속고,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며, 악독과 투기로 지내고, 가증스러워 서로 미워하던 자”였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장재형 목사는 죄의 보편성과 전인성—지성, 의지, 감정 모두가 오염된 상태—을
강조한다. 여기에 ‘각색 정욕’은 성적 욕망 하나로 축소될 수 없는, 인간의 전반적 욕심과 쾌락
추구를 가리킨다. 원문이 “여러 욕망과 즐거움”(ἐπιθυμίαις καὶ ἡδοναῖς)이라 명시하는 만큼, 성적 일탈뿐 아니라 소비주의적 중독, 인정 욕망, 권력에의 탐닉 등 삶 전반을 사로잡는 우상적 충동을 포함한다는 점을 주해적으로 보완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처럼 죄의 교리가 인간학의 정직한 해부라고 한다면, 4–7절은
은혜 교리의 풍성한 서정이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φιλανθρωπία)이 나타날 때” 구원은 시작된다.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여기서 ‘중생’(παλιγγενεσία)은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남이고, “씻음”(λοῦτρον)은 세례를 연상시키되 의식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한 존재 변화를 가리킨다. ‘새롭게 하심’(ἀνακαίνωσις)은 성령의 현재진행형 사역으로, 한 번의 사건으로 닫히지 않고 평생의 성화 여정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바울은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히 부어 주셨다”고 덧붙이며,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을 구원의 종착점으로 제시한다. ‘후사’(κληρονόμοι)는 로마법 아래 양자(養子)가 친자와 같은 법적 지위를 가진 관습을 배경으로 한다. 곧 우리는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입양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나라를 상속받을
영광의 신분을 부여받았다.
이 신학의 아치가 바울 전체 신학과 긴밀히 호응한다는 점도 장재형목사는 간파한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 규정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음을 고백한 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를 살리셨다고 노래한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바라(엡 2:10)”라는 전개는 디도서의 결론—은혜에서 선행으로—과 똑같은 궤적이다. 율법으로 흠이 없던 바리새인 출신인 바울 자신이 이 은혜의 역설을 가장 깊이 체험했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고백이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 자기부인의 깊이에서 솟아난 도덕적 확신으로 들린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이 두 기둥, 곧 죄와 은혜를 목회의 본령으로 천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의 실체를 직시할 때 치유의 기쁨이 깊어지듯, 죄의 실상을 솔직히
고백할 때 은혜의 감격이 넓어지고, 그 감격이 행위의 동력이 된다.
그래서 3장 8절은 “이 말이 미쁘도다”로 절정을 찍고 곧바로 명령형으로 전환한다. “이것을 굳세게 말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라.” 교리에서 윤리로, 신앙에서 실천으로의 전환은 바울 신학의 탁월함을
보여 주는 리듬이다. 장재형 목사는 ‘선한 일’을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강조한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선행으로 ‘은혜의 아름다움’을 가시화한다. 교회 바깥의 공공영역에서 유익함을 더하는 삶, 곧 지역 사회의 필요를 선제적으로 채우고, 예산과 시간을 기꺼이
흘려보내며, 직장과 학교와 온라인 공간에서 공정과 친절과 절제를 습관화하는 삶이 바울이 말한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의 현대적 모습이다. 이때 선행은 신앙 홍보의 수단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가는 존재론적 필연이다. 장재형목사의 적용은 현실적이다. 신앙인의
기부 문화, 봉사와 돌봄, 직업윤리의 갱신, 정치적 타자에 대한 언어 절제 등은 디도서의 “선한 일”을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구현할 수 있는 실례들이다.
선한 일을 막는 기제에 대한 경계도 빼놓지 않는다. 3장 9절은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고 한다. 무익하고 헛된 논쟁이 공동체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선행의 추진력을 탈진시키기 때문이다. 10–11절은 더 나아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단어 ‘이단’은
후대의 정형화된 교리적 의미만이 아니라, 본문 원어 ‘하이레티코스’(αἱρετικός)의 뉘앙스—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파당적·분열적 인물—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전통적 의미의 이단 경계와 더불어, 교리적으로 정통을 표방하면서도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분파적 영성’을 함께 경계해야 한다고 첨삭한다면, 본문 정신에 더 충실해진다. 예수의 가라지 비유처럼 열매의 계절이
오면 진짜와 가짜는 자연스레 드러난다. 교회는 한두 차례의 온유한 훈계와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되, 끝내 공동체의 선과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경계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사랑 없는 배척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취하는
최소한의 공동선 보전 조치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서신의 말미(3장 12절
이하)는 사도 바울의 목회 철학을 작은 디테일 속에 숨겨 놓는다. 바울이
디도를 니고볼리(니코폴리스)로 부르며 “아르테마스(국내 번역에 따라 ‘아데마’)나 두기고” 중 한 사람을 보내 교회를 비우지 않도록 배치하는 장면은, ‘목자 없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보여 준다. 니고볼리는 악티움 승리를 기념해 세운 ‘승리의 도시’로 알려져 있고, 바울은 에피루스의 그 항구 도시에서 과동(過冬)하며 서방 선교(일리리쿰/일리리곤 일대까지, 롬 15:19)를
내다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급히
보내되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라”는 요청은, 율법 전문가(νομικός, 모세 율법에 정통한 학자)와 성경 교사 아볼로 같은
동역자들과의 지적·영적 교류를 목회자의 ‘겨울나기’ 필수 요소로 간주했음을 암시한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겉옷”과 “책과 가죽 종이” 그리고 “마가”를 요청한 대목과 나란히 놓으면 더 분명해진다. 혹한의 계절을 버티는
데 필요한 세 가지—몸을 덮을 따뜻함, 영혼을 덮을 말씀, 마음을 덮을 동역—은 오늘의 목회자와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장재형목사의 언어로 옮기자면, 신앙의 겨울일수록 우리는 더 따뜻하고
더 깊고 더 함께여야 한다.
14절의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는 권면은, 영성의
깊이가 실천의 밀도와 연결되어야 함을 다시 확인한다. ‘배우게 하라’는
동사는 선한 일을 저절로가 아니라 ‘학습’으로 여길 것을
요구한다. 교육과 훈련, 작은 습관 만들기, 구조적 선행 설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교회가 지역의 필요를 조사하고, 봉사의 루틴을 만들고, 재정과 시간을 훈련하며, 다음 세대가 선한 일을 ‘배우도록’
커리큘럼을 짜는 일은 디도서적 목회의 정중앙에 있다. 그 모든 수고의 테두리는 마지막 인사로
마감된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서신의 시작과
끝을 감싸는 단어가 은혜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출발도 은혜, 과정도
은혜, 결말도 은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디도서 강해 전체가
가리키는 북극성도 은혜다. 권위의 근거도 은혜, 순종의 동기도
은혜, 선행의 에너지 원도 은혜다. 이 은혜의 시학을 오늘로
번역한다면, 우리는 정치적 온도차가 커지는 사회에서 온유로 대화하고,
정보 과잉과 말의 폭력이 일상이 된 플랫폼에서 침묵과 경청의 미덕을 회복하고, 도시의 빈틈을
선행으로 메우는 시민 신학을 실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장재형목사라는 고유명사는 특정 인물의 이름을
넘어, ‘말씀을 먼저 살아냄으로 권위를 획득하는 목회’라는
표지어로 기능할 수 있다.
여기까지 요약하면, 장재형목사의 디도서 3장 강해는 첫째, 목회 권위의 원천을 삶의 실천에서 찾고, 둘째, 하늘 시민권과 땅의 시민권 사이의 책임 있는 순종을 통해
복음의 길을 평탄케 하며, 셋째, 죄와 은혜라는 복음의 양
날개로 성도의 존재를 재정의하고, 넷째, 선한 일의 꾸준한
학습과 실천으로 공동체 안팎에 공공선을 축적하는 작업으로 귀결된다. 이 모든 것은 교회가 내부적 경건과
외부적 유익을 동시에 추구하도록 설계된 바울의 목회 신학이 오늘 여기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길의 첫머리는 여전히 같다. “이 말을 굳세게 말하여”라—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그러나
온유하게 선포하라. 그다음은 배움과 습관과 동역으로 이어지는 평범한 시간의 축적이다. 겨울이 오면 더 따뜻하고, 더 깊고, 더 함께하면 된다. 그러면 은혜는 다시 우리의 미덕을 살리고, 우리의 선행은 이웃의 삶을 살리는 길이 된다. 그렇게 교회는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는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복음은 오늘의 언어와 몸짓으로 또 한 번 신뢰를 획득할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디도서 3장에서 이끌어 낸, 죄와 은혜 그리고
선한 일을 향한 목회적 본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