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멈춤을 명령하는 소리, 그 거룩한 경외 앞에서
고도(古都)의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도시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던 아잔(Azan), 기도 시간을 알리는 그 장엄한 부르짖음의 말이다. 그 소리는 단순한 알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혼돈과 욕망으로 들끓는 인간 세상의 심장을 향해 쏘아 올린, '멈추라'라는 창조주의 엄숙한 명령이었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분주하던 시장의 상인도, 찻집에서 담소를 나누던 노인도, 거리를 내닫던 아이들도, 하던 모든 것을 일제히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깨끗한 물로 손과 발을 씻고,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향해, 메카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이마가 차가운 바닥에 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의 얼굴에 서린 것은 '경건함'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절대자 앞에 선 피조물의 완전한 복종과 헌신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서성이는 이방인이었고 이교도였다. 그러나 감히 그 거룩한 침묵을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일사불란한 몸짓과 경외에 찬 침묵 앞에서, '예배'라는 것이 한낱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실존적 무게일 수 있음을 압도적으로 목격했다. 그들의 삶은 예배를 위한 것이었고, 예배는 곧 그들의 삶 자체였다.
닮은 듯 다른 길, 건널 수 없는 골짜기
기독교와 이슬람, 두 거대한 신앙의 여정은 모두 '예배'라는 심장을 중심으로 고동친다.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향해 경배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정해진 시간에 공동체가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은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꾸란은 예배가 인간 존재의 목적임을 분명히 선언한다. “나는 인간과 진(Jinn)을 창조하지 아니하였으되, 이는 나를 경배케(예배) 하려 함이라.” (꾸란 51:56)
이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그 지향점에서 정확히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두 신앙 모두 창조주 앞에서의 '드림'을 말한다. 이처럼 외적으로 드러나는 헌신과 경건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종종 두 예배 사이에 놓인, 결코 건널 수 없는 깊고 아득한 골짜기를 보지 못하곤 한다. 그들의 경건이 주는 무게감에 눌려, 우리는 정작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것을 잊어버린다.
첫 번째 길: 의무와 공로로 쌓아 올린 탑 (이슬람의 예배, '이바다')
그 경건한 몸짓의 이유와 목적을 깊이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길과 마주하게 된다. 이슬람의 예배(이바다, Ibadah)는 그 어원 자체가 '섬김', '복종', '노예'를 뜻한다. 이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알라께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의 체계이다.
그들의 신앙고백(샤하다)의 핵심은 알라의 절대적인 유일성(타우히드)과 초월성이다. 알라는 절대적인 주권자(Rabb, 주인)이며,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자 종(Abd, 노예)이다. 이 관계는 명확한 상하관계이며, 이 사이를 메우는 것은 '복종'이라는 의무이다.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의 기도(살라트), 라마단 기간의 금식(사움), 자선(자카트), 그리고 일생에 한 번의 성지 순례(하지)라는 '다섯 개의 기둥'을 통해 알라의 호의를 얻고 최후의 심판 날을 대비한다. 이 모든 경건한 행위는 알라의 명령에 순종하는 복종의 표현이며, 동시에 천국(잔나)에 들어가기 위해 쌓아야 할 '공로(Amal)'이다.
중동의 시장에서 만났던, 눈빛이 선하고 독실했던 한 무슬림 친구의 고백이 이슬람 예배의 본질을 날카롭게 보여주었다. "나는 알라의 명령이기에 기도합니다. 이것은 무슬림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나는 이 행위들을 통해, 심판의 날에 나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보다 무거워져 알라의 자비로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의 말처럼, 그들의 예배는 '행위'를 통해 신에게 나아가려는 인간의 열망이 담긴, 장엄하고도 고독한 길이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과 헌신, 의무의 이행이라는 제물을 끊임없이 쌓아 올려 하늘에 닿으려는 처절한 시도이다.
태초의 갈림길: 가인의 땀과 아벨의 피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모든 종교적 행위의 근원을 비추는 태초의 예배 현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인류 최초의 예배는 우리에게 두 종류의 예배, 두 종류의 길이 있음을 피할 수 없는 진실로 보여준다.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가 그것이다.
이 사건이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예배를 가르는 결정적인 분수령이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즉, 자신의 땀과 노력, 수고의 결실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 가인의 제물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 자신의 노동과 정성의 집약체이다. 이는 이슬람의 예배 정신처럼, 인간이 자신의 경건한 행위를 통해 신에게 나아가려는 거룩한 시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반면, 하나님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창 4:3-5). 왜일까? 아벨의 제물이 더 비싸서였을까? 더 정성이 가득해서였을까?
히브리서는 그 이유를 단 하나의 단어로 증언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히 11:4)
무엇을 믿는 믿음일까? 아벨의 예배는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다. 가인의 제물은 '피'가 없었지만, 아벨의 제물은 '피'가 있었다. 아벨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자신의 노력이나 땅의 소산물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오직 죄 없는 생명의 '죽음', 즉 '피의 대속'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다.

두 번째 길: 은혜에 잠겨 드리는 감격 (기독교의 '예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심장이다. 아벨의 제물이 멀리서 바라본 그림자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실체이시다.
기독교의 예배는 '의무' 이전에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혹은 심판을 면하기 위해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원하고 완전한 제물의 피로, 단번에, 값없이, 영원히 천국을 선물 받은 자들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그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은혜와 감격을 이기지 못해 드리는, 눈물 젖은 사랑의 고백이다. 이슬람의 예배가 가인처럼 '나의 행위'와 '나의 공로'를 제물로 쌓아 하늘에 닿으려는 길이라면, 기독교의 예배는 아벨처럼 오직 '예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길이다(히 4:16).
그 결과, 예배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다. 이슬람의 경건한 예배가 알라(주인)와 압드(종)의 두려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와 아버지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이루어진다(갈 4:6). 이슬람의 예배가 '의무'의 이행이라면, 기독교의 예배는 '사랑'의 향연이다.
오늘, 우리의 제단에는 무엇이 쌓이고 있나
가장 안타깝고 두려운 사실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조차 이 놀라운 은혜의 특권을 잊은 채, 다시 가인의 제단 위에 자신의 제물을 쌓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주일 성수라는 종교적 '행위'로, 정성껏 준비한 헌금이라는 '공로'로, 교회에서의 헌신적인 '봉사'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 행위의 대가로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기대한다. 우리는 '아들'의 신분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종'의 자리로 돌아가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리는 그 어떤 완벽한 예배 순서도, 세련된 찬양 실력도, 논리정연한 기도도, 심지어 눈물의 헌신조차도, 그 중심에 나를 위해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대한 감격과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피 없는' 가인의 제물에 불과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도덕적 완벽함이 아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오직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자신의 깨어짐과 가난함을 그대로 안고 나오는 '상한 심령' 바로 그 한 사람이다(시 51:17).
무슬림들의 저 경건한 헌신은, 값없이 주어진 은혜를 너무나 값싸게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아픈 채찍이 되곤 한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가인의 길)으로 최선을 다해 하늘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아벨의 길)을 받은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는가?
우리의 행위와 노력을 의지하며 차가운 의무감으로 무릎 꿇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에 압도되어 뜨거운 눈물로 엎드리고 있는가.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의(義)를 쌓아 올리는 가인의 제물인가, 아니면 십자가의 은혜에 압도된 아벨의 눈물인가? 우리는 지금, 두려움으로 의무를 행하는가, 아니면 사랑으로 감격에 엎드리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