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10장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에서 읽어낸 이방인 선교의 전환, 율법과 복음, 성령의 인도와 세계 선교의 확장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사도행전 10장은 교회가 자기
내부의 언어와 규범에 갇혀 있을 때 성령께서 어떻게 그 경계를 열어젖히시는지를 보여 주는, 선교의 문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본문이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는 이 장을 단순한 역사적 일화가 아니라 ‘복음이 스스로를 확장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계시적 장면으로 읽어
왔다. 그가 사도행전10장을 반복해서 붙드는 이유는, 유대인 중심의 신앙이 이방인 선교로 넘어가는 결정적 전환이 여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라는 신앙의 중심에서 시작된 복음전파가 사마리아를 지나 땅끝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고넬료 사건은 ‘땅끝’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의 문지방을 넘는 행위임을 증명한다. 장재형목사로도 불리는 그는, 이 본문을 통해 교회가 어느 시대나 반복하는
선민 의식의 유혹과 배타적 경건의 습관을 성령의 인도 아래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본문의 무게는 두 인물의 대비에서부터 시작된다. 로마의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제국의 질서와 힘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도행전 10장은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경외심을 신앙의 초심이자 심장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내적 태도, 곧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엄숙한 존중이다. 고넬료의 경건은 일회성 감정이 아니라 습관화된 기도와 구제의 리듬에서 드러난다. 그가 드린 기도는 사적 욕망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의상달이며,
그가 행한 구제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였다. 장재형목사는 고넬료가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사회·종교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이 지향하는 핵심을 삶으로 실천했다고 말한다. 이는 율법이 단지 경계선을 긋는 도구가 아니라, 거룩과 사랑을 향해
인간을 초대하는 거울이라는 그의 강조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10장의 긴장감은
고넬료의 경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결정적인 것은 베드로의환상이다.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보자기 같은 그릇, 그 안에
담긴 부정한 짐승들을 보고 “잡아먹으라”는 명령을 듣는다. 유대 전통에서 부정한 음식은 단지 식단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표지였고, 공동체의
경계를 보호하는 상징이었다. 베드로의 거절은 율법에 대한 충성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타자에 대한 거리 두기라는 종교적 습관을 드러낸다. 그때
들려온 말씀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선언을 선교의 신학적 문장으로 읽는다. 복음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순결과 오염의 분류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새 창조의 질서를 열어젖힌다. 그리고 이 환상이 세 번 반복된다는 사실은, 성령의 인도는 때로 우리의 고집과 두려움이 무너질 때까지 같은 진리를 되풀이해 마음 깊숙한 층위까지 스며들게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율법과복음의 관계를 본문 한가운데로 끌어온다. 율법은 인간을
죄 아래로 가두어 자기 의를 포기하게 만들고, 복음은 그 포기 위에 은혜를 세운다. 로마서 2장과 3장에서
바울이 던진 질문, 곧 이방인이 율법을 모르면 구원받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실제 사건으로 해소된다. 고넬료는 할례논쟁의 중심 밖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삶이 기억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마음의 할례의 표징으로 설명하며, 율법이 제도적 표지를 통해 구분하던 선 안팎의 세계가 복음 안에서
재배치된다고 말한다. 갈라디아서의 선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다는
진술은 무질서의 허가가 아니라, 구원의 기준이 인간의 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음을
드러내는 질서의 회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재형목사가 율법의 가치를 폐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로마서 3장 31절의 논리를 따라, 믿음이
율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강조한다. 율법의 핵심은 거룩과 사랑,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와 이웃에 대한 책임이라는 윤리적 실체인데, 복음은
그 실체를 새 언약의 힘으로 가능하게 한다. 음식 규례나 절기와 같은 의식적 장치는 시대적 역할을 마치지만, 거룩함의 지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현대 교회가 빠지기 쉬운 두 극단, 곧 율법주의적
배타성과 무경계적 방임을 동시에 경계한다. 복음은 경계를 지우되, 거룩함을
지운 적이 없으며, 은혜는 규범의 파괴가 아니라 마음의 새로움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창조라고 말한다.
사도행전10장이 보여 주는
새로움은 단지 사상적 전환이 아니라, 실제 만남과 식탁으로 구현된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가이사랴로 내려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다. 유대인과이방인의 경계가 가장 촘촘하게 작동하던 영역이 바로 함께 먹는 행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신학 논쟁 이상의 충격이다. 장재형목사는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라”라고
말하는 태도에 주목한다. 선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시혜가 아니라,
동일한 인간으로서 타자를 존중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복음전파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논리의
정교함만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방식에서 자신의 진실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선교를 담장의 해체로만 이해하기보다 관계의 재구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담장은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식탁과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져야 한다.
이때 성령체험이 등장한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하는 동안,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임한다.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현상은 표면적으로는 초자연적 사건이지만, 장재형목사는 그 본질을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준으로 해석한다. 성령은 교회의 문지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를 실현하는 주체로서, 인간이 세운 자격 심사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임하신다. 할례 받은
신자들이 놀란 이유는, 그들이 성령의 역사가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가정해 왔기
때문이다. 사도행전10장의 충격은 이방인도 성령을 받는다는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선언이 현실에서 확인되는 사건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주는 것을 금하리요”라고 말한다. 인간이 금할 수 없다는 고백은, 선교의 주도권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의 언어다.
장재형목사가 이 본문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할 때, 그는 성령의 인도를
추상적인 감동이나 개인적 체험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의 인도는 교회를 더 넓은 세계로 밀어내는
힘이며, 낯선 타자에게 다가가도록 우리의 편견을 해체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의 기억에 상달되었듯, 선교의
시작점은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일상의 경건과 이웃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기도는 하늘을 여는 열쇠이고, 구제는 땅의 고통을 만지는 손이다. 기도만 있고 구제가 없으면 신앙은
자기 몰입의 신비주의로 기울고, 구제만 있고 기도가 없으면 신앙은 초월 없는 박애주의로 납작해진다. 고넬료가 붙든 두 축은 교회가 어떤 시대에도 잃지 말아야 할 균형감각이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시간의 교차를 하나님의 타이밍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기획은 사람을 모집하지만, 성령은 사람을 연결한다. 고넬료가 오후 3시에 환상을 보고,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다 환상을 본 뒤, 두 사건이 정교하게 맞물려 한 만남을 만든다. 이 섭리적 연결은
선교가 단지 전략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예비된 영혼을 향해 하나님이 길을 여신다는 신뢰를 요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신뢰가 옅어질 때 교회가 숫자와
성과에 집착하며 타자를 대상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한다. 반대로 성령의 인도를 신뢰하는 교회는, 상대를 통계가 아니라 한 영혼으로 바라보고, 만남을 지배가 아니라
섬김의 관계로 전환한다.
사도행전 10장의 영향은 그
장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 전환의 공동체적 결실로 자주 언급된다. A.D. 49~50년경으로 흔히 거론되는 그 회의에서 초대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강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루었고, 결국 필수적 조건으로서의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을, 고넬료 사건이 개인의 감동에 머물지 않고 교회의 공적 분별로 이어졌다는 흐름 속에서 이해하도록 돕는다.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공동체적 분별을 통해 역사 속에 자리 잡는다. 환상과
방언이 개인을 흥분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교회의 구조와 문화, 전통과
규범을 갱신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 성령체험은 비로소 선교의 실재가 된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세계 선교라는 언어를 단순한 지리적 확장으로 쓰지 않는다. 그는
세계화를 경험하는 21세기의 교회가, 과거 제국주의적 선교의
그림자를 성찰하며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교지라는 단어가 타자를 대상화할
위험이 있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 곧 Missio Dei의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가시고, 교회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동행하는 동역자다. 장재형목사는 이 관점을 사도행전10장과 연결하여, 교회가 자기 안전지대에 머무르는 순간 선교는 교세의 확장으로 왜곡되고, 복음은
문화적 우월감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반대로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간 베드로처럼, 교회가 타자의 문턱을 넘을 때 복음은 다시 본래의 광휘를 회복한다.
동시에 그는 복음의 핵심을 흐리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문화적 적응이 복음의 상대화로 변질될 때, 선교는 정체성을 잃는다. 사도행전10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명확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그리고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죄 사함의 은혜가 중심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핵심이 흔들릴 때 교회는 담장을 넘는 대신, 담장 밖의
언어를 빌려 자기 메시지를 비워 버리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질은 굳게
붙들고, 방식은 겸손하게 새로워져야 한다는 선교적 원칙을 강조한다. 이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할 때도 동일하다. 본질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이며, 방식은 성령이 시대와 문화 속에서 열어 주시는 길이다.
오늘의 세계는 물리적 국경보다 더 단단한 심리적 국경을 만들고 있다. 인종과 문화, 경제력과 학력, 세대와
성별, 이념과 취향이 사람을 나누고, 그 분열이 종교 공동체
안으로도 스며든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10장이 말하는 이방인이 단지 고대의 비유대인이 아니라, 오늘
교회가 낯설어하는 모든 타자의 이름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방인은 우리 밖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가 익숙한 규범으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들, 우리가 편한 언어로
붙잡을 수 없는 세계다. 교회가 그들을 속되다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깨끗하게 하심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스스로의 담을 점검하는 영적 성찰을
요청한다. 우리가 세운 담장은 교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혹은
전통을 지킨다는 미명으로, 실제로는 두려움과 우월감에서 강화되는 경우가 많다. 성령은 그 담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때로는 우리의 신앙적 상식을
흔드는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선교의 실제를 식탁 공동체로 구체화한다. 누가 교회 안에서
밥상에 앉을 수 있는가, 누가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가,
누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가 하는 질문은, 단순한 운영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정치학이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머무르고 교제했다는 기록은, 선교가 일회성
방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시간의 공유임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가 단기 행사와 이벤트 중심의 전도를 넘어, 관계적
돌봄과 지속적 제자훈련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한 영혼을 숫자로 세는 순간, 우리는 고넬료를 백부장이라는 표지로만 보는 오류를 반복한다. 그러나
고넬료는 한 가정의 가장이며, 친구와 친지들을 모아 말씀을 듣고자 했던 진지한 구도자였다. 그 구도자의 심장에 닿는 언어는, 통계의 언어가 아니라 인격적 만남의
언어다.
기도의상달과 구제가 함께 갈 때, 선교는
하늘과 땅을 동시에 품는다. 고넬료가 보여 준 경건과 구제의 결합은,
복음이 들어갈 자리를 미리 열어 놓는 영적 토양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상은 교회의
말보다 교회의 태도를 먼저 읽는다. 교회가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면서 복음을 말할 때, 그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반대로 교회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신뢰의 공간을 만들 때, 복음은 억지로 밀어 넣는 논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빛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빛을 은혜라는 단어로 포착한다. 은혜는 값싼 관용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가로 주어진 하나님의 새
현실이며, 그 현실은 사랑과 거룩을 동시에 요구한다.
성령의 인도는 또한 교회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베드로에게도 두려움이 있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종교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실제로 사도행전 11장에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질문과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선택을 개인적 모험으로 변호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함으로써 공동체의 이해를 얻는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선교가 공동체적 책임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이
시키셨다는 말이 책임 회피의 구호가 아니라, 공동체를 설득하고 함께 분별하도록 이끄는 겸손한 증언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성령체험은 분열의 씨앗이 아니라 연합의 토대가 된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복음의 언어가 가진 보편성과 번역의 과제다.
사도행전10장 속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적 배경을 가진 언어로 시작하지만, 곧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열려 있다는 선언으로 나아간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로 선포하며, 그분이 유대인의 메시아를 넘어 온 세계의 주권자임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도 동일한 번역의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그 복음을 이해하는
언어는 문화와 세대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세계 선교는 언어학적·문화인류학적
감각을 요구하며, 타자의 삶을 존중하는 학습의 태도를 전제한다. 베드로가
먼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해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삶의 맥락 속에서 복음을 전했듯이, 오늘의 교회도 먼저 듣고 배우는 겸손을 회복해야 한다.
이 원리는 디지털 시대의 선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온라인 공간은 국경을 낮추지만, 동시에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담장을
세운다. 교회가 미디어 사역을 펼칠 때조차, 확산과 조회를
성공으로 오해하지 않고 관계의 깊이와 진실성을 지표로 삼아야 한다. 사도행전10장이 보여 준 선교는 바이럴이 아니라 방문이며, 스캔이 아니라 머묾이다. 기술과 네트워크를 도구로 활용하되, 결국 선교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신뢰, 그리고 그 신뢰 위에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잊지 않을 때, 교회는 새로운 매체 속에서도 오래된 복음의 무게를 지킬 수 있다. 성령의
인도는 교회를 더 빠르게 만들기보다 더 진실하게 만들며, 더 넓게 확산시키기보다 더 깊게 뿌리내리게
한다.
사도행전10장을 읽을 때 놓치기
쉬운 또 하나의 요소는, 하나님이 한 인물을 통해만 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고넬료의 환상, 베드로의 환상,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사자들의 순종이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들어, 선교는 카리스마 있는 한 지도자의 의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순종들이 연결되며 완성되는 공동 작업이라고 말한다. 고넬료가 부하를 보내는 순종, 베드로가 의심을 내려놓고 동행하는
순종, 고넬료의 가족과 친구들이 말씀을 기다리는 순종, 그리고
성령께서 임하실 때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의 순종이 모두 한 줄기로 이어진다. 이때 교회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임을 배우게 된다. 도구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목적을 드러낸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자기 이름을 크게 만들 때 선교는 왜곡되고, 예수 이름이 높아질 때 선교는 정결해진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정결함을 개인의 영성에서도 찾는다. 그는 고넬료의 경건을
신앙의 체질처럼 설명하며, 체질이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기에 매일의 기도와 작은 구제가 축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행전10장의 극적인 성령체험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번개가 아니라, 고넬료의 집에 오래 쌓인
경외심의 공기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환상도, 그의
기도 중에 주어졌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을, 선교가 바깥을 향한 활동이기 전에 안을 향한 경건의 훈련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해석한다. 교회가 기도를 잃으면 분별을 잃고, 분별을 잃으면 선교는 유행을
따라가며, 유행을 따라가면 복음의 중심을 놓친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가 기도와 말씀, 그리고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성령의 인도에 민감한 공동체로 훈련되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결국 사도행전10장과 장재형목사의 해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누구를 속되다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담장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우고 있는가.
우리는 고넬료의 기도를 듣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정작 고넬료 같은 이웃을 만나기를 두려워하지는
않는가. 세계 선교를 말하면서도, 작은 식탁의 자리에서 타자를
환대하는 일에는 인색하지는 않은가.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논쟁이 아니라 순종에서 찾는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은 신학적 문장인 동시에 윤리적 명령이며, 교회론적 원칙이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교회는 더 포용적이면서도 더 거룩한 공동체로 자라난다.
포용은 기준의 해체가 아니라 은혜의 확장이고, 거룩은 타자의 배제가 아니라 사랑의 순수함이다.
특히 다문화 사회 속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선교지를 멀리 있는 나라로만
규정할 수 없다. 장재형목사의
사도행전10장 메시지를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적용하면, 한국의
골목과 캠퍼스, 직장과 온라인 커뮤니티가 이미 사마리아이자 가이사랴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곳에서 교회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은,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분류하는 태도를 내려놓고, 복음의 은혜로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시선이 자리 잡을 때, 기도는 자기중심적 요청에서 벗어나 이웃을
품는 중보가 되고, 구제는 시혜가 아니라 연대가 되며, 이방인선교는
낯선 타자에게 다가가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기쁨이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10장 설교를 마무리하며 남기는 결론은, 선교의 확장이 곧 성령의 인도에 대한 순종이라는 점이다. 그는 교회가
내부의 안전한 경계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와 구제의 삶을 지속하며, 편견을 깨뜨리시는 성령의 음성에 응답하라고 촉구한다. 교회는 자기
보존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령의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그 부르심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얼마나
실제적인지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만남이 가능했던 이유는, 한
사람이 위대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역사 속에서 예비하신 길이 있었고, 그 길 위에 기도하는 사람과 순종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확장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이루시는 통치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행10장, 사도행전10장을 다시 읽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시 고넬료를 만나고 다시 베드로의환상을 경험하라는 부르심이다. 우리는 이방인을 멀리 있는
타문화권으로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곁의 이방인—이주
노동자, 난민, 비신자 가족, 교회 밖에 있는 청년, 상처받은 신앙인—이 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을 ‘수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그들 안에서 일하신 흔적을 알아보고 존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일이다. 성령의 인도는 교회의 언어를 더 공격적으로 만들지 않고 더 환대의 언어로 만든다. 율법이 죄를 드러내듯 우리의 편견도 드러나지만, 복음은 그 편견을
정죄로 끝내지 않고 회개의 길로 이끈다. 이처럼 선교가 확장된다는 것은, 교회가 더 많은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이웃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로 알아보고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율법이 드러내는 자기중심성과 배타성을 인정하고, 복음이
주는 자유로 서로를 환대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 배움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10장 설교에서 반복해 일깨우는 핵심 실천으로 연결된다. 경건과 구제가 분리되지 않도록 일상의 리듬을 세우고, 말씀과 기도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분별하며, 유대인과이방인을 나누던 담장처럼 오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이다. 그때 교회는 ‘확장’이라는 단어를 성장의 수사로 소비하지 않고, 은혜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성령체험을 새롭게 정의하게 된다. 방언이나 신비 체험이 없다고 성령이 없는 것이 아니고, 신비 체험이
있다고 성령이 충만한 것도 아니다. 사도행전10장에서 성령체험은
교회가 세례를 금할 수 없게 만들 만큼 분명한 표징이었고, 동시에 공동체가 이방인을 형제로 받아들이게
만든 윤리적 힘이었다. 오늘의 교회가 경험해야 할 성령체험도, 결국
관계의 담장이 무너지고, 서로의 식탁에 앉아 함께 하나님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생활의 언어가 되는 변화로 드러나야 한다. 할례논쟁이 교회의 본질을 흔들었던 것처럼, 오늘도 교회는 누가 우리와 함께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흔들린다. 그러나
사도행전10장의 대답은 간명하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이를 속되다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시 기도하고, 다시 구제하며, 다시 낯선 이웃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장재형목사가 붙드는 사도행전10장의 복음은, 그렇게 오늘도 세계 선교의 길을 열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