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야코 제도를 포함한 선도 제도 전역은 14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장기간에 걸쳐 권력 분열 상태를 겪었다. 이 시기 각 섬과 마을에는 독자적인 수장이 등장했고, 이들은 서로 경쟁하며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群雄割據-여러 영웅이 세력을 얻기 위해 겨루고 있는 상태) 국면을 형성했다. 이러한 혼란은 오키나와 본도의 구스쿠 시대와 시기를 같이하며 농경 사회의 확산과 함께 본격화했다.
당시 선도 제도에서는 정착 생활이 확대되면서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자리 잡았다.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는 지역에 따라 텐타, 안지, 카라 등으로 불렸고, 점차 권한을 확대하며 무력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각 섬은 하나의 정치 단위로 고정되지 못하고 수장 간 충돌이 반복되는 구조에 놓였다.
미야코 제도에서는 14세기 후반 무력 통합을 시도하는 세력이 등장하며 전면적인 내분이 시작됐다. 여러 수장 가운데 메구로모리 토유미야는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미야코 전역을 장악하며 최초의 통일을 이뤘다. 그러나 이 통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또 다른 유력자인 요나하 세도 토유미야가 1390년 류큐 중산왕에게 조공을 바치며 외교적 후원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미야코는 두 세력이 병존하는 이원적 지배 체제로 접어들었다.
15세기 중반, 미야코 정국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 등장했다. 메구로모리의 혈통을 이은 나카조네 토유미야였다. 그는 내부 분열을 정리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졌고, 1474년 제2쇼씨 왕조의 시조 쇼엔왕으로부터 공식적인 미야코 수장으로 임명받았다. 이로써 미야코 제도는 명목과 실질 모두에서 단일 지배 체제를 갖추게 됐다.
반면 야에야마 제도는 미야코와 달리 장기간 분열 상태를 유지했다. 이 지역에서는 오야케 아카하치와 나가타 오후슈가 대표적인 세력으로 대립했다. 나가타 오후슈는 류큐 왕부에 복속하는 노선을 택하며 미야코의 나카조네 토유미야와 협력해 야에야마 통합을 추진했다. 이에 맞서 오야케 아카하치는 외부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통일 정권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갈등은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1500년, 류큐 왕부는 오야케 아카하치의 공물 거부와 반란을 중대한 도전으로 판단하고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왕부군은 미야코 세력과 연합해 이시가키섬에 상륙을 시도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아카하치 세력을 제압했다. 이 전투는 선도 제도의 군웅할거 질서를 무너뜨린 결정적 계기로 평가된다.
전쟁 이후 류큐 왕부는 선도 제도에 대한 직접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나카조네 토유미야는 미야코의 가시라로 임명됐고, 그의 차남은 야에야마 지역을 관할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는 류큐 왕부가 선도 제도를 행정적으로 편제한 첫 사례였다.
1522년 요나구니섬에서 발생한 오니토라의 난까지 진압되면서, 선도 제도 전역은 완전히 중앙 권력 아래 편입됐다. 이후 왕부는 토지 규모와 무관하게 인구 수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인두세 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지역 사회에 큰 부담을 안겼고, 선도 제도는 독립적인 정치 질서를 상실한 채 류큐 왕국 변방으로서 강한 통제를 받는 시대로 전환됐다.
선도 제도의 군웅할거 시대는 농경 사회 형성과 함께 등장한 지역 권력의 경쟁에서 출발해 류큐 왕국의 중앙집권화로 귀결됐다. 이 과정은 변방 지역이 국가 체제에 편입되는 전형적인 권력 재편 사례로 평가된다.
미야코와 야에야마에서 벌어진 200년에 가까운 분쟁은 단순한 지역 내 싸움이 아니라, 류큐 왕국 국가 형성 과정의 중요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선도 제도의 복속은 류큐 왕부가 주변 도서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 전환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