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관님, 저는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왜 죽어야 하나요." 퉁퉁 부은 눈으로 찾아온 20대 사회초년생의 절규는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대학 졸업 후 안 먹고 안 입으며 7년을 모은 1억 원, 거기에 대출까지 끌어모아 마련한 첫 전셋집이었다.
하지만 집주인은 소위 '빌라왕'이라 불리는 자였고, 그가 사망하자마자 집은 경매로 넘어가 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건 종잇조각이 된 계약서와 갚아야 할 빚더미뿐이었다.
최근 인천 미추홀구에서 발생한 '건축왕' 사건은 대한민국 전세 시스템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사기꾼 일당은 공인중개사까지 매수해 조직적으로 세입자들을 속였다. "근저당이 있어도 보증금은 100% 안전하다"는 전문가의 말을 믿은 것이 죄라면 죄였다. 피해자 4명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했고, 유서에는 "나라가 국민을 버렸다"는 원망이 가득했다. 이것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이 방조한 '사회적 살인'이다.
35년 경찰 생활 동안 수많은 사기꾼을 잡아넣었지만, 전세 사기범들처럼 악질적인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청년과 신혼부부의 '주거 불안'을 먹잇감으로 삼는다. 수백, 수천 채의 빌라를 '무자본 갭투자'로 사들이고, 돌려막기를 하다가 터지면 "배 째라" 식으로 드러눕는다. 피해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거리에 나앉는데, 구속된 가해자는 옥중에서 변호사를 선임하며 형량을 줄일 궁리만 하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피해자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다. "그러게 등기부 등본을 잘 확인했어야지", "왜 위험한 빌라에 들어갔냐"며 피해자를 탓하는 2차 가해가 쏟아진다. 하지만 작정하고 속이려 드는 조직적 사기를 개인이 무슨 수로 막아내나. 공인중개사가 공모하고, 감정평가사가 집값을 부풀리고, 허그(HUG)가 보증을 서주는 이 '카르텔' 앞에서, 사회초년생인 청년들은 그저 도살장에 끌려온 양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대책은 여전히 '사후약방문'에 그치고 있다. 전세 사기 특별법이 제정되었지만, 피해자 인정 요건은 까다롭고 실질적인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은 빠져 있다. "정부가 빚을 더 내줄 테니 그 돈으로 집을 사라"는 식의 대책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덩이를 안겨주는 꼴이다. 당장 오늘 밤 잘 곳이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대출 이자 감면이 아니라, 떼인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실한 희망이다.
전세는 한국 청년들에게 '계층 이동의 사다리'였다. 월세를 아껴 전세로 가고, 전세금을 발판 삼아 내 집 마련을 꿈꾸는 것이 대한민국의 공식이었다. 하지만 전세 사기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열심히 살아봤자 사기꾼 좋은 일만 시킨다"라는 허무주의가 청년 세대를 지배하고 있다. 집이 안식처가 아닌 공포의 대상이 된 나라에서, 누가 결혼을 하고 누가 아이를 낳겠는가.
법은 약자의 편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법은 임대인의 재산권 보호라는 명분 아래, 임차인의 생존권을 외면하고 있다. 사기 피해금을 국가가 우선 변제하고 사기꾼에게 끝까지 추징하는 강력한 법안이 통과되어야 한다. 사기꾼이 숨겨놓은 재산을 찾아내 1원 한 푼까지 탈탈 털어 피해자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빌라왕은 독버섯처럼 계속 자라날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 쪽방촌에서, 혹은 차가운 한강 다리 위에서 마지막을 고민하는 청춘들이 있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경찰의 수사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당신의 돈을 반드시 찾아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집은 투기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권리다. 그 권리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만 있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칼럼니스트 소개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이자 35년간의 경찰 생활을 총경으로 마무리한 치안 행정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 주요 기관에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감수성, 4대폭력 예방, 자살 예방 및 직장 내 장애인 인식 개선, 인권 예방, 리더십 코칭 등 폭넓은 주제로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 등이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인권이 성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