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① 삼국사와 고리사가 밝히는 대륙 영역의 실체
제목: 김부식도 몰랐던 동신성모, 송나라 땅에 왜 고구리 설화가 남았는가
부제: 삼국사 권12와 고리사 책봉 기사가 증언하는 삼한의 대륙 영역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나의 정체성을 깨닫고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보물창고다.
사람이 살며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면,
역사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지식이 되어야 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그 역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건이 벌어진 영역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강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결코 진실은 파악되지 않는다.
이 신문의 제호인 '우리역사와 땅'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삼국사가 우리나라 역사만이 아닌 동아시아 국가 간 역학관계 연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학자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은 놀랍다.
삼국사를 읽다 보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많이 쓰여 있음에 놀라곤 한다.
일례로 편찬자인 김부식이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 최고의 지식인이었음에도
자국 조상의 설화를 몰랐다는 사실도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송나라 우신관에서 만난 동신성모
삼국사 권12, 신라본기 마지막에 붙인 논평을 보자. 김부식이 직접 쓴 글이다.
政和 연간에 상서 이자량을 송에 보내 조공할 때, 김부식이 문한의 임무를 띠고 보좌하여 갔다.
우신관에 이르러 한 집에 선녀 상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 나라의 신인데, 그대들은 이를 아는가?"라고 하였다.
왕보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옛날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임신하여 사람들에게 의심받자,
바다에 배를 띄워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으니, 그 아이가 해동의 시조 왕이 되었다.
황실의 딸은 지상의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상이다."
김부식은 또 송의 사신 왕양이 동신성모에게 제사 지내는 글을 보았는데,
"현인을 잉태하여 나라를 처음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 동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 수 있으나,
그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을 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적었다.
이 기록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실
첫째, 줄거리로 보아 주몽 관련 설화인 듯하고 앞의 여주인공은 유화부인을 말한다.
둘째, 오히려 고리에는 유화부인의 상이 없었고, 후손인 김부식은 그 설화를 몰랐다.
셋째, 뒤쪽 여주인공은 진한과 동신성모라는 이름 등으로 혁거세의 어머니로 추정된다.
넷째, 당시 송 지역에 그 전설이 남아 제사가 일상이었다면, 신라 영역이 송이 되었다는 뜻이다.
왕보는 김부식이 예종 11년(1116년)에 이자량을 정사로 한 사행에 동행하였을 때 만난 인물이다.
왕양은 고리 예종 5년(1110년)에 송에서 고리에 왔던 사신이다.
두 사실이 모두 북송 때 일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송나라 사신이 고리 조상에게 제사를 올린 까닭
송의 사신 왕양이 왔던 고리의 영역에 동신성모의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신라의 영역이었던 땅을 고리가 당시에 보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 사람이지만 고리 조상을 존중하여 제사를 지낸 것이다.
다만 그 영역이 어디인지는 위 내용만으로 추정할 수 없으나, 북송 시기이므로 하북성을 영역에 품고 있을 때다.
김부식이 갔던 송에 고구리 조상의 설화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그 땅이 고구리의 영향력이 미쳤던 영역이었기에 설화가 전해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소위 화하족의 영역이었다면 고구리의 설화가 전해져 있을 리가 없다.

일본 지도의 선구자 長久保赤水가 1785년 교정하였다고 한다.
고리사의 책봉 기사가 증언하는 삼한의 영역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리사 권3, 성종 2년(983) 3월 기사를 보자.
송에서 이거원과 공유를 보내 왕을 책봉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삼한의 옛 영역과 백제가 남긴 봉토를 차지하였고, 땅은 큰 바다를 끼고 있다. 인하여 고려국왕으로 책봉합니다."
같은 고리사 성종 4년(985) 5월 기사에는 더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송에서 왕저와 여문중을 보내 책봉을 높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삼한의 옛 땅은 본디 예의와 겸양의 나라이므로, 늘 백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길이 장회의 겨레를 무성하게 하시오.
사지절 현도주제군사 현도주도독 충대순군사 고려국왕이라 하며 식읍 1천 호를 더합니다."
고리 개국 초 오대의 후당 시절에도 유사한 기사가 있다. 태조 왕건 16년(933) 3월이다.
"그대는 동방(장회)의 대족으로 큰 바다 너머 웅대한 번국에서... 삼한의 즐거운 땅을 다스리니...
이제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장회는 어디인가
長淮(장회)는 회하와 양자강 사이 지역을 가리키며 흔히 江淮(강회)라고도 한다.
이 예문으로써 고리가, 옛날 고구리의 영역이었으나 후진 석경당과 거란이 거래하였던,
연운십육주를 확보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백제와 신라 영역이었던 산동의 일부와 강회 지역은 고리의 초기 영역이었을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던 압록강 하구에서 함흥 앞바다를 자르는
소위 한반도조차 차지하지 못했다는 제도권 사학의 허망한 논리를
이 사료들이 가차 없이 허물어뜨리고 있다. 이 사실과 함께
고리사에 수없이 등장하는 지명인 장춘, 요양, 철령 등이
지금도 지도에 시퍼렇게 살아, 언제라도 학인할 수 있음에
사학자들이 눈감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제1회 끝, 제2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