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아웃 시대의 실존 철학 - 3. 가짜 노동 : 불안을 가리기 위해 쌓아 올린 서류 더미
많은 직장인들은 하루를 이렇게 보낸다.
아침에 출근해 이메일을 확인하고, 회의를 준비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또 다른 회의를 한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지만 퇴근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도대체 무엇을 만든 것일까.”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점 더 바쁨과 동일시되고 있다. 일의 가치보다 중요한 것은 일이 얼마나 많아 보이는가, 그리고 얼마나 바쁘게 보이는가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하나의 도발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바로 ‘가짜 노동(Bullshit Jobs)’이다.
그는 많은 현대 직장인들이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계속해야 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정확히 설명한다.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은 비교적 명확했다. 노동자는 물건을 만들고, 농부는 작물을 재배했다. 노동의 결과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직장인의 노동은 다르다.
문서를 작성하지만 그 문서는 읽히지 않고,
회의를 하지만 그 회의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는 노동을 반복하기도 한다.
이러한 노동은 인간에게 묘한 피로를 남긴다. 육체적 피로보다 더 깊은 존재적 피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느낄 때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반대로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노동은 점점 더 공허해진다.
현대 조직에서 가짜 노동이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관리와 평가의 방식 때문이다.
조직은 구성원의 일을 측정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업무는 실제 가치보다 가시성으로 평가된다.
눈에 보이는 보고서
눈에 보이는 회의
눈에 보이는 업무 기록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일처럼 보이는 활동을 늘리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프로젝트에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좋은 아이디어일 수 있다. 그러나 조직은 그 아이디어보다 그 과정에서 작성된 수십 장의 보고서를 더 중요하게 여길 때도 있다.
그 순간 노동은 창조가 아니라 관리의 흔적이 된다.
현대 사회는 성과를 강조한다. 성과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성과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많은 조직에서 성과는 숫자와 지표로 표현된다.
몇 개의 보고서를 작성했는가
몇 번의 회의를 진행했는가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동시에 관리했는가
이러한 지표는 노동의 질보다 노동의 양을 강조한다.
그 결과 조직은 점점 더 많은 활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활동은 다시 더 많은 보고서와 회의를 낳는다.
이것이 바로 가짜 노동이 스스로를 확대하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직장인들이 이러한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계속 일한다. 왜일까.
첫 번째 이유는 생존이다.
직장은 생계를 유지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정체성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직업은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다.
세 번째 이유는 불안이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이 세 가지 이유가 결합할 때 사람들은 가짜 노동을 알면서도 계속 반복하게 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일, 행동으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활동이다.
일은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는 활동이다.
행동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대 직장 사회의 많은 활동은 노동과 일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바쁘게 움직이지만 세상에 남는 것은 많지 않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직업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연결된 문제다.
가짜 노동의 문제는 단순히 비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이 의미를 잃는 순간, 인간의 삶 역시 방향을 잃기 시작한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많은 일을 요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일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다.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이 일은 정말 필요한 일인가.
이 일은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이 일은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짜 노동의 구조를 넘어 진짜 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