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주의의 위기와 글로벌 변화
최근 세계 정치와 경제의 중심축이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국제 회의장이나 글로벌 협력 선언문에서 들려오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 붕괴에 대한 우려는 더 이상 학술적 담론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일상 속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연 국제 사회는 이 균열을 극복할 충분한 도구와 의지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가운데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오늘날 국제 사회는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1945년 유엔이 창설된 이후 80년 이상 유지되어 온 다자주의는 점차 약화되고 있으며, 지정학적 경쟁 속에서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글로벌 경제, 기후 변화, 공중 보건 등 주요 분야에서 협력의 장벽을 높이고 있습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4년 글로벌 무역 증가율은 3.0%에 그쳐 2010년대 평균인 4.5%를 크게 밑돌았으며, 이는 다자간 무역 협력 체계의 약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개인과 국가의 일상을 뒤흔드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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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협력이 흔들릴 때, 무역과 환경, 그리고 우리의 건강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요? Global Tax Justice의 Dr.
Dereje Alemayehu는 'Repairing the Foundations of Democratic Multilateralism and Keeping Alive Financing for Development'라는 글에서 현재 다자주의 기반이 손상되었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유엔의 설립 목적이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 비극을 예방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오늘날 국제법이 '정글의 법칙(law of the jungle)'으로 대체될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다자주의의 기반이 손상되었을 때 개별적인 노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다자 시스템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고 Alemayehu 박사는 강조합니다. 특히 개발 재원(Financing for Development) 마련 과정이 처음에는 민주적 다자주의의 기능적 시스템을 전제로 했으나, 현재는 그 전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분석은 현대 국제 질서의 분열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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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개발 재원이 단순히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을 위한 모금 수단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 및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파장은 우리의 사회적 일상에도 점점 더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국은 GDP 대비 수출 비중이 40%를 상회하는 무역 의존형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글로벌 무역 협력이 지연될 경우 한국은 수출 산업의 경쟁력이 저하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곧 일자리 감소와 경제 성장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무역협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다자간 무역 체계 약화로 인한 잠재적 수출 손실 규모를 연간 3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한 바 있습니다.
또한, 기후 변화 대응이 국가주의적으로 편향된다면 국제 기후 규제가 불균형을 초래하고, 한국의 친환경 산업 발전이 큰 도전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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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2050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으나, 이는 국제 사회의 협력적 탄소 감축 체계 내에서만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개발 재원 마련의 구조적 도전
구체적으로 기후 변화 대응에 있어, 국제해운 부문은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한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습니다. Climate Home News의 Catherine Bowyer가 'Green shipping talks are a test for multilateralism'이라는 글에서 제시한 바에 따르면, 국제해사기구(IMO)에서 진행되는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다자간 협력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분열과 국가주의적 주장이 얽히고설키며 큰 논란을 겪고 있습니다.
Bowyer는 "국제해운의 녹색 전환은 현재의 다자주의 상태를 보여주는 축소판과도 같습니다. 성공 여부는 국제 사회의 협력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은 세계 1위 조선 강국이자 5위 해운 국가로서 글로벌 선박 발주량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분야의 논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으며, 녹색 선박 기술 개발과 친환경 연료 전환을 주도함으로써 다자주의 협력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갈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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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보건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Center for Global Development에 기고한 글 'No One Wins If Multilateralism for Health Loses'에서 Gunilla Carlsson(전 스웨덴 국제개발협력부 장관)과 Anders Nordström(전 WHO 사무차장)은 국제 보건 협력이 실패하면 결국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경고하며, 다자주의 복원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세계가 팬데믹에서 얻은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보건 시스템 강화를 위한 다자적 협력은 전 세계적으로 보건 접근성을 높이는 데 핵심입니다."라고 강조하며, WHO의 역할 강화와 글로벌 보건 안보 체계 구축에 각국이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경험한 의료 물자 부족과 백신 배포의 불평등 문제는 한국에게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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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K-방역 모델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나, 글로벌 백신 공급망 구축에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향후 유사한 위기 상황에서 한국이 백신 생산 허브나 의료 협력의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면 다자간 보건 협력 체계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자주의 복원과 국제 협력이 쉽지만은 않은 과제임은 분명합니다.
일부에서는 다자주의가 지나치게 느리고 복잡하며, 실제 문제 해결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반론도 제기됩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 협상의 경우 1992년 리우 정상회담 이후 30년 이상 논의가 계속되었지만 실질적인 온실가스 감축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혹자는 신속하고 강력한 단독 또는 지역적 행동이 더 실효성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의 단독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이나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같은 일방적 조치들이 단기적으로는 뚜렷한 정책 효과를 내고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개별 국가의 목표 달성은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내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대의 글로벌 문제, 특히 기후 변화와 전염병은 국경을 넘는 협력 없이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이 주목해야 할 국제 협력의 방향성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한국은 경제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제 다자 협력의 중심에 설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현실화하려면 보다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합니다.
한국은 2021년 기준 국민총소득(GNI) 대비 공적개발원조(ODA) 비율이 0.16%로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평균인 0.33%에 크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개발 재원 확대를 통해 국제 개발 협력에서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 시급합니다. 한국은 유엔, 세계은행 등 주요 국제기구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한편, 기후 변화, 보건 위기, 글로벌 금융 시스템 개혁 논의에 실질적 참여를 확대해야 합니다.
한국은 2021년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송도에 유치하고, 2022년 세계식량안보위기 대응 특별각료회의를 개최하는 등 다자 협력 플랫폼 구축에 일정 부분 기여해왔습니다. 또한 한국이 주도한 '포용적 녹색성장을 위한 연대(P4G)'는 민관 협력을 통한 지속가능발전의 새로운 모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개발 재원 마련과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을 위한 기여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2030년까지 SDGs 달성에 필요한 연간 재원 갭은 약 4조 달러로 추산되는데, 한국이 혁신적 금융 메커니즘 개발과 개도국 역량 강화 지원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면 글로벌 영향력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국제 혼란 속에서 관건은 다자주의의 복원과 확장입니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협력의 중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경제와 사회의 안정은 물론 장기적인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선택해야 할 방향은 과거의 사소한 분열과 국가주의적 갈등을 넘어서는 협력의 길일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이 한국과 세계의 미래를 위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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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globaltaxjustice.org
climatechangenews.com
centerforglobaldevelopment.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