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재산, 덕망을 두루 갖춘 완벽한 기사가 하루아침에 나병에 걸려 세상의 혐오와 소외 속으로 추락한다. 치료 조건은 단 하나, 처녀가 자진해 심장의 피를 내어줄 것. 800여 년 전 쓰인 이 파격적인 서사가 드디어 우리말로 옮겨졌다. 나무와바다 출판사가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가엾은 하인리히』를 중세 독일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국내 최초의 한국어판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기사 하인리히가 아니라 이름 없는 농부의 어린 딸이다. 부모의 필사적인 만류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소녀의 결심은 어린아이의 충동이 아니라, 삶과 죽음 그리고 구원에 대한 놀라운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읽는 이를 압도한다.
작품의 백미는 수술실 장면이다. 문밖에서 칼 가는 소리를 들으며, 벽 틈 사이로 수술대에 묶인 소녀를 바라보는 하인리히. 그 순간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과 자신의 추악한 몰골이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 한 장면에서 이야기 전체가 뒤집히며, 교만했던 기사는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겠다는 결단에 이른다. 역설적이게도 그 내려놓음이 기적 같은 치유를 불러온다.
번역을 맡은 김태성 부산대 명예교수는 이 작업을 자신에게 맡겨진 필생의 과제로 여겼다고 밝혔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과 함께 신학적·문학적 맥락을 고루 짚는 작품 평설이 수록되어 학술서이자 교양서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갖춘다.


















